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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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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초상(宋時烈 肖像)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 유학자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초상화이다. 이 초상화는 가로 56.5㎝, 세로 97㎝로 비단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반신상이다.

노론(老論)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본관은 은진(恩津)이었으며, 아명은 성뢰(聖賚)이고,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이다. 1633년(인조 11년) 생원시(生員試)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며, 후에 이조판서와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조선 후기 사림의 영수이자, 효종(孝宗, 1619~1659)의 신임과 사림의 중망 덕분에 오랜 은거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 대신들은 그의 의견에 따라 정책을 결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1674년(현종 15년) 효종의 비가 사망하면서 발생한 제2차 예송(禮訟) 논쟁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西人)들이 패배함에 따라, 파직⋅삭출되었다. 그러다가 1689년(숙종 15년) 1월 숙의 장씨(淑儀張氏)가 훗날 경종(景宗, 1688~1724, 재위 1720∼1724)이 되는 아들을 낳자 원자(元子)의 호칭 문제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발생하였다. 이때 송시열은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그의 관작이 회복되었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을 세웠고, 다음해에는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한편 초상화 속에 송시열은 머리에는 검은색 건을 쓰고 유학자들이 평상시에 입는 창의(氅衣)를 걸친 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과장되게 표현한 거구의 몸체와 개성적인 눈썹, 그리고 깊게 패인 광대뼈의 주름은 학식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얼굴은 엷게 채색한 다음 갈색 선으로 주름을 그렸고 옷의 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이 그림 오른쪽에는 그가 45세 때 쓴 글이 있고, 위쪽에는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의 찬문이 남아있다. 화가 및 만들어진 연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화가의 솜씨가 뛰어나서 명암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강한 눈매와 숱 많은 눈썹, 붉은 입술 등으로 그의 강직한 성품을 드러냈으며, 옷의 흑백을 대조시켜 유학자로서의 기품을 더해주고 있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의 사상을 이끌어온 노론의 영수로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모든 사상과 정치에서 그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전개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인물이다. 특히 효종 대의 북벌(北伐) 논쟁과 예송 논쟁, 그리고 그의 후학들이 이룬 노론의 정치사는 조선 후기를 가름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한편 송시열 초상은 1987년 국보 제239호로 지정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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