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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동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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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동묘(萬東廟)는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위치한 사당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선을 도와준 명(明)나라 신종(神宗)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

만동묘라는 이름은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의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을 모본하여 화양리 바위에 새겨놓은 것을 그 첫 글자와 끝 글자에서 취해 지은 것이다.

만동묘의 기원은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이 북경(北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의 네 글자를 얻어다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게 주면서 시작되었다. 송시열은 이 네 글자를 1674년(현종 15년) 화양리에 있는 절벽에 새기고 여기에 운한각(雲漢閣)을 지었다. 그런데 1689년(숙종 15년) 송시열이 사사(賜死)되면서, 송시열은 이곳에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낼 것을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 1641~1721)에게 유명(遺命)으로 남겼다. 이에 권상하는 1703년(숙종 29년) 민정중을 비롯하여 정호(鄭澔, 1648~1736)⋅이선직(李先稷)과 함께 부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만동묘를 창건하고 신종과 의종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1726년(영조 2년)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이 묘(廟)를 중수하고 그 전말을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제전(祭田)으로 사용할 관둔전(官屯田)과 노비를 주었다. 이어 조정에서는 1744년(영조 20년)에는 충청도관찰사로 하여금 묘우(廟宇)를 중수하게 하는 한편, 화양리에 있는 토지 20결을 면세전(免稅田)으로 하여 제전에 쓰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묘우 수직(守直) 및 세전(稅錢) 수납 등의 혜택을 만동묘에 주었으며, 1747년(영조 23년)에는 이재(李縡, 1680~1746)의 찬(撰)과, 유척기(兪拓基, 1691~1767)의 전서(篆書)로 묘정비(廟庭碑)를 세웠다. 이후 1776년(정조 즉위년)에는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가 어필로 만동묘를 사액(賜額)하였고, 1844년(헌종 10년)에는 봄과 가을에 한 번씩 관찰사로 하여금 정식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렇듯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만동묘는 그러나 이후 유생들의 집합 장소가 되어 많은 폐단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1865년(고종 2년) 조정에서는 대보단(大報壇)에서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만동묘를 철폐하였다. 그러나 1873년(고종 10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이 물러나자, 이듬해 왕명으로 다시 부활하였는데, 이것은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일파가 유생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취한 조처였다.

한편 일제 치하에 들어서면서 만동묘는 여러 수난을 당하였다. 우선 1907년에는 우리 의병을 토벌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환장암(煥章庵)과 운한각을 불태웠으며, 이듬해에는 만동묘를 폐철하는 동시에 만동묘에 소속된 재산을 국가와 지방 관청에 귀속시켰다. 이런 상황에서도 1910년 송병순(宋秉珣, 1839~1912) 등이 존화계(尊華契)를 조직하여 제사를 이어가는 등 유림들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제향이 이어졌으나, 1940년부터는 일제의 강압으로 영영 끊기게 되었다. 이어 1942년에는 만동묘 건물이 철거되었으며, 그 자재는 괴산경찰서의 청천면 주재소를 짓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렇게 만동묘의 흔적은 사라졌으나, 1983년 홍수 때 만동묘의 내력을 기록한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가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만동묘정비를 옛 자리에 다시 세우고 묘역을 정비하였다.

만동묘는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명나라를 섬기고 청나라를 배척하며 소중화 의식을 키웠던 조선 후기의 사상을 알아볼 수 있는 주요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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