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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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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초상(李瀷 肖像)은 조선의 대학자인 이익(李瀷, 1681~1763)의 초상화로, 이익주자학보다는 사회 개혁적인 논의를 주로 하였다.

이익의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자는 자신(自新)이고, 호는 성호(星湖)이다. 1681년(숙종 7년) 10월 18일에 아버지 이하진(李夏鎭)와 어머니 권씨(權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듬해에 사망하였다. 어려서 너무 병약하였던 탓에 이익은 10세가 넘어서야 둘째 형 이잠(李潛)으로부터 글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1706년(숙종 32년) 9월에 희빈 장씨(禧嬪張氏)를 두둔하는 상소를 올린 둘째 형 이점이 역적으로 몰려 17, 18차의 형신(刑訊) 끝에 47세를 일기로 옥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익과거에 대한 뜻을 버리고 평생을 첨성리에 칩거하며 학문에만 매진하다가, 1763년(영조 39) 12월 17일 오랜 병고 끝에 죽었다.

그의 자손들 및 제자들 또한 뛰어나서 아들 이맹휴(李孟休, 1713~1751)는 『예론설경(禮論說經)』과 『춘관지(春官志)』, 『접왜고(接倭考)』 등을 남겼으며, 손자 이구환(李九煥)은 조업(祖業)을 계승하였다. 문인으로는 윤동규(尹東奎, 1695~1773)⋅신후담(愼後聃, 1702~1761)⋅안정복(安鼎福, 1712∼1791)⋅권철신(權哲身, 1736~1801) 등이 있어 당대의 학해(學海)를 이루었고, 그 흐름은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게까지 이어졌다.

이익은 한편으로 허목(許穆, 1595~1682)윤휴(尹鑴, 1617~1680) 등의 뒤를 이어 주자(朱子)에게로만 치우치는 폐풍에서 벗어나 수사학적(洙泗學的)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을 부흥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익은 이단잡설과 훈고(訓詁)⋅사부(詞賦)는 물론, 이기(理氣)의 논의도 당시 사회에 아무런 실익을 주지 못한다고 보았다. 즉 그의 학문과 사상은 경세실용(經世實用)이라는 면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양반들이 문장이나 시가에만 힘쓰지 말고 사회를 바로잡아 나갈 수 있는 실효성 있는 학문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신분제적인 사회구조를 고쳐서 점진적으로라도 노비를 해방시킨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은 그의 사상이 근대적인 직업관과 신분관에 접근하였음을 나타낸다. 결론적으로 그는 왕도 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덕치(德治)로써 인정(仁政)을 베풀어야 한다는 본원적인 유교정치를 지표로 삼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17세기 이래 조선의 사회변동에 따른 개혁을 지향하였던 것이다.

그의 저서로는 『이익사설(星湖僿說)』을 비롯하여 『곽우록(藿憂錄)』과 『이익선생문집(星湖先生文集)』, 『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 『사칠신편(四七新編)』, 『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 등이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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