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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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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초상(朴趾源 肖像)은 18세기에 조선의 사회상을 비판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워서 실천할 것을 주장하였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초상이다.

박지원은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생활하였다. 한때 생원진사시에서 장원을 하며 촉망을 받기도 하였으나, 서른 살이 될 무렵부터 홍대용(洪大容, 1731~1783)과 사귀면서 서양의 신학문 등을 연구하였고, 그 결과 박지원은 끝내 과거를 포기하였다. 그러다가 1777년(정조 1년)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이 그를 벽파(僻派)로 몰아가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1771년(영조 47년)에 찾았던 황해도 금천의 골짜기인 연암골에 가족들과 함께 정착하였다. 박지원의 호인 연암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한편 정묘호란(丁卯胡亂)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조선에서는 인조(仁祖, 1595~1549, 재위 1623~1649)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안겨준 청(淸)나라에 대한 북벌론이 팽배하였다. 여기에는 ‘소중화(小中華)’를 주장하며 조선의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사상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북벌론은 한동안 조선의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자리 잡았으나, 18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서서히 북학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는 청나라가 정치적 안정뿐 아니라 문화적 발전을 이룩해가는 상황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이제 청나라는 배움의 대상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이러한 때에 은둔 생활을 하던 박지원은 1780년(정조 4년) 서울로 돌아왔다. 같은 해 5월 삼종형 박명원(朴明源, 1725~1790)이 고희를 맞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의 정사(正使)로 사행길에 올랐다. 박지원은 박명원의 권유를 받고는 그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약 5개월여의 사행길에 동행하였다. 이 여행에서 문화적 충격을 받은 그는 조선으로 돌아온 후 몇 년의 작업 끝에 오랑캐로만 치부하였던 청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상을 소개하며 북학론을 개진한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발표하였다. 『열하일기』는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 또한 파격적이면서도 직접적이었으며, 해학적이기까지 하였다.

이 외에도 젊은 시절의 넉넉하지 못했던 시기를 바탕으로 몰락 양반의 어려운 처지 및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양반의 모습을 그린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민옹전(閔翁錢)』 등의 한문소설들을 쓰기도 하였다. 그의 소설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경제를 발전시킴으로써 국민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데, 이것 또한 그의 북학론이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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