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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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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초상(丁若鏞 肖像)은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장한 실학자이자 개혁가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초상화이다.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 경기도 광주군 마현에서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지낸 정재원(丁載遠, 1730~1792)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으로부터 글을 배웠는데, 4세에 천자문을 익히고, 7세에 한시를 지었으며, 10세 이전에 이미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三眉集)』을 편찬하였을 만큼 매우 영특하였다. 22세에 초시에 합격한 이후 성균관 재학 시에 이미 정조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28세에 대과에서 2등으로 합격하며 벼슬길로 나갔다.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의 최측근이었던 그는 희릉직장(禧陵直長)으로부터 출발하여 가주서(假注書), 지평(持平), 교리(校理), 부승지(副承旨) 및 참의(參議)를 지냈으며, 주교사(舟橋司)의 배다리 및 수원성과 기중가(起重架) 등을 설계하는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였다.

그러나 1800년(정조 24년) 가장 큰 후견인이던 정조가 사망하면서 정약용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사학(邪學)으로 간주되던 천주교와의 관련성이 그에게 큰 타격을 입혔는데, 이것은 내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 1801년(순조 1년) 발생한 신유박해(辛酉迫害)는 형인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을 비롯하여 주변 인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때 정약용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그해 2월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11월에 강진으로 이동하였다. 18년 동안의 긴 강진 유배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온 것은 1818년(순조 18년)으로, 당시 정약용은 57세였다. 이후 1836년(헌종 2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정약용은 고향인 마현에서 실학 사상을 집대성하였다.

한편 강진 유배 생활동안 정약용은 『경세유표(經世遺表)』 및 『흠흠신서(欽欽新書)』, 『목민심서(牧民心書)』 등의 저서를 통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국가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장인영국(匠人營國)과 정전법(井田法)을 중심으로 한 체국경야(體國經野)의 건설을 제시하였다. 통치와 상업, 국방의 중심지로서의 도시를 건설하고, 정전법을 중심으로 한 토지를 개혁한 후 이를 바탕으로 세제, 군제, 관제, 신분 및 과거 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도를 고치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술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주례(周禮)』의 체국경야 체제를 기본 모형으로 삼은 후 조선 후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상공업의 진흥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822년(순조 22년) 정약용은 스스로 자신의 묘지명인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었는데, 이에 따르면 그의 저작은 경집 232권과 문집 267권으로 모두 499권에 이른다. 『자찬묘지명』 작성 이후 정약용은 자신의 말년동안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을 개정하거나, 『상서고훈(尙書古訓)』과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을 개수하고 합편하여 『상서고훈(尙書古訓)』으로 정리하는 등 저작에 대한 분합, 필삭, 윤색에 온 힘을 기울여 182책 503권의 가장본 『여유당집(與猶堂集)』을 완성하였다. 정약용이 세상을 뜬 후, 그의 아들 정학연(丁學淵, 1783~1859)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에게 『여유당집』의 교열을 부탁하였으며, 1883년(고종 20년)에는 왕명에 따라 전사되어 내각에 수장되었다.

이렇듯 정약용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 개혁의 의지를 집대성하고, 개혁의 당위성을 강력히 주장하였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개혁안은 묵살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 몰락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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