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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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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정약용 유적(康津 丁若鏞 遺蹟)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11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실학을 집성(集成)한 유적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의 최측근으로 조정에서 활동하던 정약용정조 사후 당시 사학(邪學)으로 간주된 천주교과의 관련성 때문에 1801년(순조 1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그는 40세였는데, 처음 4년간은 강진읍 동문 밖 주막집 한 칸짜리 방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짓고 이곳에서 머물렀다. 이후 정약용은 백련사(白蓮寺)에 들렀다가 해남 대흥사(大興寺)의 혜장선사(惠藏禪師, 1772~1811)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1805년(순조 5년) 강진읍 뒷산에 있는 보은산방(寶恩山房)으로 거처를 옮겨서 9개월을 머물렀다. 혜장선사와의 교우를 통하여 정약용은 다도(茶道)를 익히게 되었는데, 이후 다도는 유배 생활을 감내하는 동반자가 되었다.

이어 1806년(순조 6년)부터 정약용은 그의 제자인 학래(鶴來) 이청(李晴)의 집에서 거주하다가, 1808년(순조 8년) 도암에 있는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은 원래 귤동(橘洞) 마을의 윤단의 산간 정자였는데, 윤단이 그의 손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정약용을 초빙한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정약용의 제자가 되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정약용은 다소 여유를 갖고 유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외에 정약용의 부친 정재원(丁載遠, 1730~1792)과 절친이던 윤광택(尹光宅, 1732~1804) 및 그의 아들이자 정약용의 죽마고우였던 윤서유(尹書有)의 배려 또한 정약용의 유배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정약용의 외동딸과 윤서유의 아들 윤창모(尹昌模, 1795~1856)가 혼인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정약용은 강진에서의 18년의 유배 생활 가운데 11년간을 다산초당에서 살면서 『경세유표(經世遺表)』 및 『흠흠신서(欽欽新書)』,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500여 권의 저서를 집필하며, 방대한 실학 체계의 대부분을 구상하고 정리하였다. 즉 정약용은 중년이라는 한창의 나이 때 유배라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자신의 실학 사상을 반영하고 조선 후기 실학 사상을 집대성한 서적들을 집필하며 이 시기를 극복하였던 것이다.

현재의 다산초당은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주축이 되어 옛터의 주춧돌 위에 기와집으로 다시 세운 것이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茶山艸堂’(다산초당) 현판을 걸었다. 1963년 사적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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