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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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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운현궁[서울 雲峴宮]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사가(私家)이자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다. 흥선대원군의 집과 1910년 대에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 본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을 합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원래는 궁궐에 필적할 만큼 크고 웅장하였다고 전해진다. 담에는 4문(門)을 두었으며, 집의 제일 앞 남쪽에는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이 있었고, 뒤쪽인 북쪽으로는 행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 있었으며, 북쪽엔 안채인 노락당(老樂堂)이 있었는데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또한 선조(先祖)인 은신군(恩信君)과 남연군(南延君)을 모신 사당(祠堂)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파괴 및 변형되어 서울 운현궁의 원형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노안당 등이 남아 있다.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이 즉위하면서 대원군에 봉해졌는데, 이는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가 되는 경우였다. 대원군에 봉해진 이후 섭정을 맡았던 흥선대원군은 10여 년간 정치를 하면서 세도 정치의 폐단을 제거하고 인사⋅재정 방면의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불에 탄 경복궁(景福宮)을 다시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 때에, 흥선대원군은 서울 운현궁에서 중국 청(淸)나라로 납치되었다. 이렇듯 그가 정치를 주도하였던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서울 운현궁은 1977년 사적 제257호로 지정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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