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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 체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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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조선과 일본의 양국 사신들이 조일 수호 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 조약) 체결을 위해 회담하는 장면을 그린 삽화와 회담 장소인 강화도 연무당에서 촬영한 조선 대표들의 모습이다. 조일 수호 조규는 1876년(고종 13) 2월 조선이 일본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면서 불평등한 조약이다.

이 조약의 체결에 앞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강력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추진하며 프랑스(병인양요)와 미국(신미양요)의 통상 요구를 물리치고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는 등 자본주의 세계질서로의 편입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대외 정책은 1873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게 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민씨 세력이 정권을 주도하면서 대원군의 정책을 정면 부정하였고, 청과 전통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에도 유화 정책을 펼쳐 나갔던 것이다. 사회 일각에서도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 실학파를 중심으로 부국강병을 위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통상 개국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제기되면서, 조선을 침략하자는 여론이 형성되어 갔다. 1875년 일본은 운요호를 보내 강화도와 영종도에서 무력을 행사하였는데, 조선 수비대가 경고 사격을 한 것을 두고 주권 침해라고 주장하며 통상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접견대관으로 판중추부사 신헌(申櫶, 1811~1884)을, 접견부대관으로 도총부부총관 윤자승(尹滋承)을 임명하여 회담에 임하였다. 당시 운현궁에 물러나 있던 흥선대원군은 협상 자체를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많은 양반들과 민중들까지도 반대하고 나섰으며, 정부도 일본이 제시한 조약 초안을 놓고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조선과 일본이 충돌할 것을 막기 위하여 조약 체결을 권유하기에 이르자, 결국 강화도에서 일본과 공식 회담을 개최하고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강화도 조약은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식 조약이다. 조약 체결로 인해 조선은 부산, 원산, 인천의 3개 항을 차례로 개항하였고, 이로 인해 발달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조약의 제1조에서 조선이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자주국임을 선언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은 일본의 자유로운 연해 측정과 치외법권을 허용하였고, 조계지의 설정과 일본 화폐의 유통,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 등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렇게 일본의 강요에 의해 체결된 조약이었기에 불평등한 내용이 다수 포함되었고, 이것은 이후 일본의 식민주의적 침략을 가져오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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