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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제물포항을 분할한 각국의 조계지를 나타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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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총 2매로 구성된 편자미상의 제물포항각국조계도(濟物浦港各國租界圖) 중 1매로서 개항 당시 인천 제물포항에 들어선 외국 각 나라의 조계지를 나타낸 지도이다. 지도의 상단부 중앙에는 ‘Plan of Settlement in Chemulpo’라는 영문 제목이 쓰여 있다. 다른 한 매는 중국 조계지와 그 북쪽 지역을 그린 것으로 연대 표시가 되어 있어 지도가 1893년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즉 조⋅일 수호 조규가 체결되자 차례대로 부산과 원산, 인천항이 개항하였다. 개항장 인천은 서울과 인접한 지리적인 이유때문에 서양 여러 나라와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그들의 문물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인천에는 외국 영사관이 들어오고 통상 활동을 하게 되면서, 각 나라의 상인과 무역상들이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개항장 내에 일정한 범위를 외국인의 거주지로 정하고, 그 지구 내 지방 행정관의 전부 또는 일부를 외국 정부 또는 거류 외국인들에게 위임한 조계지(租界地)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인천은 1883년 1월에 개항을 하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제일 먼저 일본의 조계지로 설정되었다. 일본의 조계지는 현 자유 공원 남쪽 일대로서 처음에는 약 7천 평에 이르는 지역이었지만, 점차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들자 1889년에 추가로 4천 평의 공간이 더 조성되었다. 청국은 1884년에 현 선린동 일대 구릉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의 조계지에는 특히 유명 중국 음식점이 많이 들어와서 번창하였는데, 오늘날 이 지역에 중국 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서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선은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등과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현재 송월동, 송학동, 북성동 일대에 약 14만평에 달하는 조계지를 형성하였다. 대체로 응봉산을 경계로 북촌에는 조선인이 거주하였고, 남촌에 일본 등 외국인들이 거주하였는데, 응봉산 아래에 서구식 주택이 많다고 하여 양관촌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개항 전만 하더라도 인천은 제물포라고 불리는 조그만 어촌 마을이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각국 상인들과 외교관이 들어서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이에 제물포는 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국제 항구 도시로 변화하였고, 그에 따라 각종 사회 기반시설과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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