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개화와 자주 운동

인천 개항장

※ 가운데 사진을 클릭하시면 이미지 슬라이드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은 개항 당시 인천 제물포항의 전경을 담은 것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조선은 부산과 원산, 인천항을 개항하였다. 1883년 1월에 개항한 인천은 서양 여러 나라와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면서 그들의 문물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더욱이 서울과 가까운 곳이었으므로 대부분의 외교 사절이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고, 최초의 외국 기업인 세창 양행이 세워진 곳도 바로 인천항이었다. 비록 외세에 의한 개항이었지만,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의 신문물과 신문화는 인천을 빠르게 변모시켜 나갔다.

그리고 초기에 외국 영사관들이 주로 인천에 있었으므로, 영사관을 중심으로 각 나라의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에 따라 외국 영사관과 상인, 무역상들이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개항장 내에 일정한 범위를 외국인의 거주지로 정하고, 그 지구 내 지방 행정관의 전부 또는 일부를 외국 정부 또는 거류 외국인들에게 위임한 조계지(租界地)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제일 먼저 생겨난 조계지는 일본의 조계지였다. 일본의 조계지는 현 자유 공원 남쪽 일대로서 처음에는 약 7천 평에 이르는 지역이었지만, 점차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들자 1889년에 추가로 4천 평의 공간이 더 조성되었다. 청나라는 1884년에 현 선린동 일대 구릉 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의 조계지에는 특히 음식점이 많이 들어와서 번창하였는데,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이 지역에 많은 중국 음식점들이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등과의 조약 체결로 현재 송월동, 송학동, 북성동 일대에 약 14만평에 달하는 조계지가 형성되었다. 대체로 응봉산을 경계로 북촌에는 조선인이 거주하였고 남촌에는 외국인들이 거주하였는데, 응봉산 아래는 서구식 주택이 많다고 하여 양관촌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개항 당시 인천은 제물포라고 불리는 조그만 어촌 마을이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각국 상인들과 외교관이 들어서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이에 제물포는 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국제 항구 도시로 변화하였고, 그에 따라 각종 사회 기반시설과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