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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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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881년(고종 18)에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군대인 별기군(교련병대)의 모습이다.

강화도 조약 이후 서구 열강의 침투가 심해지자 고종은 부국강병책을 위해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를 목적으로 발달된 근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조사 시찰단을, 청에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하였다. 이후 개화와 관련된 정책을 총괄하기 위해 청의 양무운동 추진 기구인 총리아문을 본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였다. 통리기무아문에서는 외교⋅통상을 비롯하여 군사⋅산업⋅외국어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중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군사 제도를 바꾸었는데, 기존의 5군영에서 무위영과 장어영의 2군영 체제로 개편하고, 별도로 무위영 안에 신식 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이 시기 일본도 조선 정부에게 소총을 기증하고 군사 훈련을 돕겠다고 나서, 육군병학교 출신의 호리모토 레이조(掘本禮造)를 교관으로 보냈다.

별기군의 총책임자인 교련소 당상은 외척 가운데 소장 거물인 민영익(閔泳翊)이 담당하였다. 그 외 정령관에는 한성근, 좌부령관에 윤웅렬, 우부령관에 김노완, 참령관에 우범선이 임명되었고, 군사 훈련은 일본인 호리모도가 담당하였다. 별기군은 일본인 교관에 의해 훈련된다 하여 왜별기(倭別技)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개화 정책과 부국강병의 일환으로 새로 신설된 별기군인 만큼 급료와 피복 등의 모든 면에서 기존의 구식 군대보다는 훨씬 좋은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다음해인 1882년에 구식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이들의 습격을 받아 와해되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군사 제도 자체가 다시 옛 군영체제로 돌아갔고, 별기군 또한 오군영의 본대로 흡수되었다.

조선 정부는 새롭게 군사 개혁을 시도했지만 개혁 의지와는 달리 미숙한 운영 체계와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별기군은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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