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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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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인물은 우리나라 개화파의 비조(鼻祖)로 불리는 오경석(吳慶錫)이다. 그는 역관(譯官)으로 지중추부사를 지낸 오응현의 맏아들로 1831년(조선 순조 31)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거(元秬), 호는 역매(亦梅)⋅진재(鎭齋)⋅천죽재(天竹齋) 등이다.

우리나라에서 개화 사상이 정확히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19세기 문호개방을 주장하였던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이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18세기 북학파 실학자였던 박지원박제가 등은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을 비판하면서 청의 선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들의 사상이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오경석 등에게 계승⋅발전된 것이다.

오경석은 16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역관의 길로 들어섰고, 23세 되던 1853년에 처음으로 청에 가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였다. 그 후 13차례나 중국을 오가면서 견문을 넓히는 한편, 서구 열강에 의해 무너져 가는 중국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고 조선의 개화에 앞장서게 된다. 이 시기 그는 『해국도지』와 『영환지략』과 같은 세계 지리와 서양 문물을 소개한 책들을 들여왔다. 특히 중국인 웨이위앤(魏源)은 『해국도지』에서 서양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겪었던 조선에서 서구 열강의 침략을 막고 근대화를 이루는데 관심을 가졌던 개화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오경석은 역사적 위기에 처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청년들에게 개화 사상을 보급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1870년대 초부터 박규수의 집에서 김옥균박영효유길준⋅서광범⋅홍영식 등 몇몇 양반 자제들을 모아 개화 사상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1870년대 말에는 ‘개화당’이 조직될 수 있었다.

오경석강화도조약 당시 문정관에 발탁되어 회담에 참여하였는데, 군함을 이끌고 온 일본과 대결해서 승리할 능력이 없음을 간파하고 박규수에게 개국을 추진하도록 건의하였다. 비록 최대한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국을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뜻한 대로 되지 않았지만, 나라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외교 활동에 크게 노력하였다. 그 과정에서 과로로 인해 1876년 4월에 쓰려져 병석에 누운 뒤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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