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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직전 개화파 인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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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갑신정변 이전에 찍은 개화파 인사들의 사진이다.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부터 서광범⋅민영익, 맨 왼쪽이 홍영식, 뒷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유길준이다. 앞 줄의 어린이는 당시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유학 중이던 박용화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개화 사상이 정확히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19세기 문호개방을 주장하였던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이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18세기 북학파 실학자였던 박지원박제가 등은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을 비판하면서 청의 선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들의 사상이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오경석 등에게 계승⋅발전되었다. 박규수는 그의 집에서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의 젊고 유능한 양반 자제들을 모아 놓고 개화 사상을 가르쳤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개화파(개화당)가 형성되었다.

강화도조약 이후 개화파는 서양의 선진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근대 국가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분열되었다.

김홍집어윤중⋅김윤식 등의 온건 개화파는 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입장에서 유교 질서를 수호하며 서양의 과학, 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민씨 정권과 타협하면서 청과의 전통적인 관계도 유지하며 점진적인 개혁 정책을 표방하였다.

반면 김옥균⋅서광범⋅박영효 등의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아 서양의 과학 기술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사상과 제도까지도 적극 수용해야 된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청을 끌어들인 민씨 정권을 배척하고, 온건 개화파를 사대당이라고 비판하였다.

1884년 급진개화파에 의해 일어난 갑신정변은 청군의 철수를 틈타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우정총국 낙성 축하연에서 민씨 정권의 고위 관료들을 살해하면서 시작된 갑신정변은 14개조의 개혁 정강을 중심으로 국가 체제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개화 사상이 널리 보급되지 못한 상황에서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데다가 청군이 개입함으로써 정변은 3일 천하로 실패하고 말았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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