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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주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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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갑신정변의 주역들인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이다.

중국중심의 화이론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조선 스스로 서양의 선진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근대 국가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던 개화파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기 시작하자,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분열되었다. 온건개화파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입장에서 유교 질서를 수호하며 서양의 과학, 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입장이었고, 급진개화파는 서양의 과학기술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사상과 제도도 적극 수용하자는 입장이었다.

1884년 베트남 문제로 청과 프랑스가 대립하자, 청은 절반의 조선 주둔군을 베트남 전선으로 철수시켰다. 이 때를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 인사들은 임오군란 이후 청의 세력을 끌어들인 민씨 정권을 몰아낼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이들 급진개화파들은 정변을 계획하고, 일본에게 개혁에 필요한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1884년 10월 급진개화파는 우정총국 낙성 축하연을 이용하여 민씨 정권의 고위 관료들을 살해하고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청에 대한 사대 관계(조공)의 청산, 인민 평등권의 확립, 지조법의 개혁, 호조의 재정 관할, 내각 중심의 정치 등을 내용으로 하는 14개조의 혁신 정강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정변 직후 청군이 진격해 와서 창덕궁을 포위하고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던 일본이 철수함으로써 급진개화파의 정변은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홍영식, 박영교 등의 핵심 인물이 살해되었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급진개화파가 추진한 갑신정변은 국제 정세를 면밀히 살피지 못하고 일본에 너무 의존하여 성급히 추진하였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또한 개화 사상이 널리 보급되지 못한 상태에서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고 소수 지식인들만의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근대 국민 국가를 실현하려고 했던 개혁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며, 이후 갑오개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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