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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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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894년 12월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되고 있는 전봉준의 모습이다.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은 조선 말기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로서, 본관은 천안(天安)이며, 초명은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이다.

동학 농민 운동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수탈로 인하여 일어났다. 1893년(조선 고종 30) 11월 전봉준은 고부 군수 조병갑을 찾아가 과중한 세금징수와 노동력 착취 등의 학정을 시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고 쫓겨났다. 이에 최경선⋅김도삼 등 20여 명과 함께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천여 명의 동지들을 규합한 후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농민군들은 무기고를 파괴하고 창고에서 곡식을 꺼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후 조사관으로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동학도에게 책임을 돌리자, 전봉준은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걸고 무장에서 봉기하였다. 이후 잇따라 관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전주성까지 점령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청에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청군이 조선에 출병하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구실로 군대를 파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동학 농민군폐정 개혁안의 시행과 농민군의 신변을 보장해 줄 것을 전제로 정부와 전주화약을 체결한 후 해산하였다. 이후 전라도 각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교정청을 설치하여 폐정 개혁안을 실천해 나갔다.

한편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자,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강화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반침략의 기치를 내걸고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진격하였지만, 주력 부대가 공주 우금치에서 패퇴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전봉준은 은신하여 다시 거사를 일으킬 준비를 하였으나, 1894년 12월 2일 순창군 피노리에서 부하인 한신현과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되었다.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던 전봉준은 이듬해 3월 의금부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동학 농민 운동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반봉건, 반외세의 민족 운동으로서 이후 갑오개혁에 영향을 미쳤고, 일부 잔여 세력들이 1890년대 이후 전개된 항일 의병 투쟁에까지 활약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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