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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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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인물인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은 조선 말기의 정치가로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능(景能), 호는 도원(道園)이정학재(以政學齋)이다. 1867년(조선 고종 4)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그는 1880년에 제2차 수신사(修信使)로 임명되어 58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인천의 개항을 주장하였고, 일본 공사가 한성부에 주재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또한 황쭌셴(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과 정관잉(鄭觀應)의 『이언(易言)』을 가지고 돌아와,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정부가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설치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통상 관계를 담당하였고, 1882년에는 미국⋅영국⋅독일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할 때 전권대신의 부관으로 임명되어 협상의 실무를 맡는 등 개화 정책의 추진과 외교 실무 분야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무엇보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을 구실로 일본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궁궐을 장악하자, 새로 신설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총리대신에 올라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군국기무처가 해체되는 같은 해 12월까지 과거제와 신분제를 철폐하는 등 봉건적 전통 질서의 타파를 목적으로 하는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박영효와 연립내각을 수립하고 「홍범 14조」를 발표하여 내정 개혁에 힘썼다. 1895년에는 박영효와의 갈등으로 잠시 물러났다가 같은 해 7월에 다시 입각하여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세 번째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때 일본의 견제를 위해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인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벌어지고, 단발령에 의해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위기에 처한 고종이 1886년 2월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발생하자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었고, ‘왜대신(倭大臣)’으로 지목된 김홍집은 광화문 앞에서 군중들에 의하여 타살되었다.

타살되기에 앞서 그의 신변을 걱정한 일본군이 그를 피신시키려 하였지만, 그는 “조선의 총리대신으로서 동족의 손에 죽는 것은 천명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나는 것은 짐승과도 같다”고 호령하였다고 한다.

비록 일본의 힘을 빌어 조선을 개혁하려고 하여 친일파였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은 행동을 보면, 조선의 근대화라는 확고한 정치적 신념에서 비롯된 친일이었다고 재평가되고 있기도 하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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