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주권 수호 운동의 전개

독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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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독립 협회가 조선의 자주적 독립을 상징하기 위해 예로부터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운 독립문이다. 독립문서재필(1864~1951)이 조직한 독립 협회에서 주도하여 건양(建陽) 원년(1896)에 착공하여 1898년 완공하였다.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은 1895년 말 귀국하여 중추원의 고문이 되었다. 그는 아관파천으로 실추된 국가와 국왕의 위상을 되찾고 자주 독립을 위한 국민의 계몽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 독립 협회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우기 위해 누구나 기금을 내면 독립 협회의 회원이 될 수 있도록 규정함으로써 다양한 계층의 참여를 유도하였고, 그에 따라 국민적인 단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편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의 환궁과 칭제건원의 여론 및 상소가 빗발치자, 고종은 약 1년 여 만에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와 1897년 10월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고친 다음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고종의 환궁 후, 러시아는 군사 교관 및 재정 고문의 파견과 절영도의 석탄 기지를 요구하며 우리나라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에 독립 협회만민 공동회를 열고 러시아의 내정 간섭과 이권 침탈을 비판하는 국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러시아는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을 철수시키고, 절영도의 조차 요구도 철회하였다. 이와 같은 독립 협회의 자주 국권 운동은 민중들로 하여금 큰 호응을 얻으며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였다. 그러나 1898년 말, 보수세력에 의해 독립 협회가 황제를 부정하고 공화정으로 바꾸려 한다는 모함이 나오게 되자, 고종만민 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독립 협회의 지도자들을 체포해 버림으로써 독립 협회의 개혁은 사실상 좌절되었다.

독립 협회는 자주 주권을 수호하고 민중 계몽을 통해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 근대화를 추진하려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서구 열강들에게는 우호적인 태도로 그들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의 침략 의도를 세심히 살피지 못했다는 한계도 지니고 있다.

자주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은 1979년 성산대로의 공사로 인해 불가피하게 원래 자리에서 서북쪽으로 70m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자리에는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 7.13. 서울특별시장’이라고 새긴 동판을 묻었다고 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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