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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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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대한제국이 세워지고, 서양식 황제복을 입고 찍은 고종 황제의 모습이다.

고종(高宗, 1852~1919)의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이며, 후에 희(熙)로 개명하였다. 자는 성림(聖臨, 후에 明夫로 고침), 호는 성헌(誠軒)이며, 영조의 현손(玄孫)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이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고종(재위 1863~1907)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섭정(攝政)을 함에 따라 10년이 지난 1973년에서야 친정(親政)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정권은 민비의 척족들에게 장악되었고, 그에 따라 대외 개방 정책을 통해 일본 및 서구 여러 나라들과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며 개방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왕권이 미약했던 조선은 주변 강대국들의 힘겨루기에 이용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 속에서 결국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은 약 1년여 만인 1897년에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정부 관리들은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고종에게 칭제건원(稱帝建元)을 건의하였다. 그에 따라 그 해 10월,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고친 다음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후 1899년에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반포함으로써 제1조에 대한국은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 제국임을 명문화하였고, 군 통수권⋅입법⋅행정⋅사법⋅외교⋅인사권 등의 모든 권한을 황제가 갖는 전제 군주국임을 표방하였다.

고종 황제는 갑신정변이나 갑오경장과 같은 개혁이 너무 급진적이고 외세 의존적이었음을 깨닫고,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른바 ‘광무개혁’은 “옛 것을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것을 참작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을 전제로 황제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고종은 원수부를 설치하여 직접 군대를 통솔하고 장교를 육성하는 등 국방력 강화에 힘썼다. 그리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토지 소유자에게 지계(地契)를 발급하였다. 이에 따라 실제 경작 농지의 넓이를 정확히 파악하여 안정적으로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였다. 이 외에도 서양의 과학 기술과 기계를 도입하여 적극적인 상공업 진흥 정책을 펼쳤고, 해외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근대적인 산업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장려하였다.

고종광무개혁은 정치⋅사회⋅경제 면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드러냈지만, 독립 협회에서 민권을 확대하려는 개혁 노선이 황권을 약화시킬 것을 우려했는지 독립 협회를 해산시켜 버렸고, 만민 공동회 또한 강제 해산시킴으로써 민중 의식의 성장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광무개혁은 외세에 대한 의존을 배제하면서 자주적으로 시행되었고, 아관파천으로 실추된 국가와 황제의 위상을 회복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황제권 강화에 너무 역점을 둔 나머지, 독립 협회를 해산하는 등 민권을 신장시킬 기회를 잘라버렸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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