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주권 수호 운동의 전개

의병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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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일제의 국권 침탈 기도에 맞서 총을 들고 일어났던 의병 부대의 모습이다. 영국인 종군기자였던 프레드릭 맥켄지(F. A. Mckenzie, 1869~1931)가 1907년 접전지였던 강원도로 가서 의병들을 직접 만나보고 찍은 사진으로, 그의 저서인 『대한제국의 비극』(1908)에 실려 있다.

일제에 대항한 본격적인 의병운동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면서 시작된 을미의병이었다. 전통적으로 조선은 유교 사상에 입각한 사회였던 관계로, 국모(國母)의 시해 사건과 머리를 자르는 단발령은 위정척사 사상을 가지고 있던 보수적 유생층의 반발로 이어졌다. 따라서 초기의 의병운동은 이들 유생층이 주도하였고, 점차 반일⋅반침략을 주장하던 잔여 동학 농민군과 일반 백성들이 가세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발생한 고종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일 내각이 무너지면서, 단발령을 취소하고 의병 해산 권고 조칙이 내려져 대부분의 의병은 해산하였다.

이후 1905년에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또 다시 의병 운동이 일어났는 데 이를 을사의병이라고 한다. 이때는 유생뿐만 아니라 평민층에서도 의병장이 등장하였고, 민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함에 따라, 의병 운동이 전 민족적인 국권수호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민종식(閔宗植)이 이끄는 의병이 충남 홍주성을 점령하고, 최익현(崔益鉉)이 태인⋅정읍⋅순창 등지를 장악하는 등의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력이 우세한 일본군의 반격으로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사진에 나타나듯이 의병이 더욱 강력한 무기로 무장하고 의병운동이 더욱 격렬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고종 황제헤이그 특사의 파견을 빌미로 강제 퇴위를 당하면서부터이다. 이 시기 의병정미의병이라고 한다. 이때 대한제국의 군대 또한 해산되었는데, 이를 거부한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합류함으로써 의병 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의병 운동이 더욱 조직화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유생 의병장들은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였다. 이에 양주로 집결한 1만여 명의 의병들은 곧바로 서울로 진격하였지만, 이 역시도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 속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의병들은 전국 각지에서 항일 전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지역은 호남 지방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던 일제는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펼쳐, 수천 명의 의병들이 체포되거나 학살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이후의 의병 운동은 간도나 연해주 등지의 국외로 옮겨 갔고, 국권 침탈 이후에는 독립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의병 운동은 일본의 군사적 침략에 맞서 자주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족 운동이자 반제국주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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