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주권 수호 운동의 전개

쓰시마 섬으로 끌려가는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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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의병운동을 일으켰다가 관군에 체포되어 유배지인 쓰시마 섬으로 끌려가고 있는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모습이다. 최익현은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찬겸(贊謙)이며 호는 면암(勉庵)이다. 1873년 성인이 된 고종을 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게 했던 친정(親政) 상소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 되던 시기에는 스스로 의병을 조직해 일제에 항거하였다.

한말 항일 의병 운동은 위정척사 사상을 가지고 있던 보수적 유생층이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그 후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부터는 유생뿐만 아니라 평민 중에서도 의병장이 등장하였고, 각계각층에서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전 민족적인 국권 수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최익현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제자들을 모아 전라북도 태인에서 봉기하여 정읍⋅순창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때 관군과 대치하였을 때, 최익현은 관군에게 의병에 합류할 것을 간곡히 권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공격으로 의병 부대가 와해되었고, 최익현은 체포되어 쓰시마 섬에 유배된 후, 결국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의병 운동은 1907년 고종 황제가 비밀리에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것 때문에 강제로 퇴위를 당하자 더욱 격렬해졌다. 의병 부대가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고종의 퇴위와 함께 강제로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의 군인들이 새롭게 의병 부대에 합류하면서 강화된 전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 앞에서는 1만여 명이나 되는 의병 부대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는 전국 각지에서 의병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지역은 호남 지방이었는데,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던 일제는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펼쳤고, 이에 따라 호남 지역에서 활동하던 수천 명의 의병들이 체포되거나 학살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이후의 의병 운동은 간도나 연해주 등지의 국외로 옮겨 갔고, 국권 침탈 이후에는 독립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의병 운동은 일본의 군사적 침략에 맞서 자주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족 운동이자 반제국주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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