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주권 수호 운동의 전개

체포된 호남 지역 의병장들(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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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09년 일본군에게 체포된 호남 지역 의병장들의 모습이다.

한말 항일 의병 운동은 위정척사 사상을 가지고 있던 보수적 유생층이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그 후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부터는 유생뿐만 아니라 평민 중에서도 의병장이 등장하였고, 각계각층에서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전 민족적인 국권 수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1907년 고종 황제가 비밀리에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것 때문에 강제로 퇴위를 당하자, 의병 부대가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로 진격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종의 퇴위와 함께 강제로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의 군인들이 새롭게 의병 부대에 합류하면서 강화된 전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 앞에서는 1만여 명이나 되는 의병 부대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는 전국 각지에서 항일 의병 전쟁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지역은 호남 지역이었다. 일제는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의병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의병 전쟁이 가장 격렬했던 호남 지역을 대상으로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2달 동안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에는 우세한 화력을 가진 2,000여 명의 일본군이 투입되어, 전라도 내륙과 남서해안 일대 뿐만 아니라 도서(島嶼) 지역까지 범위를 확대하여 3단계에 걸쳐 의병 부대를 섬멸하였다. 이로 인해 의병장만 100여 명이 체포되거나 순국하였으며, 수천 명의 의병 부대원들이 희생되었다. 아울러 여러 채의 민가가 불에 타고, 수많은 양민들이 무참히 학살당하였다. 이로써 이후의 의병 운동은 크게 위축되어 간도나 연해주 등지의 국외로 옮겨 갔고, 국권 피탈 이후에 독립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의병 운동은 일본의 군사적 침략에 맞서 자주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족 운동이자 반제국주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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