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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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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이다. 안창호는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애국 계몽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 평안남도 강서 출신이다.

1900년대 초반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를 설립하고 『공립신보(共立新報)』를 창간하여 교포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계몽에 힘썼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귀국하여 양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비밀 결사 조직인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였다. 안창호는 독립을 위해 당장 시급한 일이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라 판단하여 평양에 대성 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애국 청년을 양성하는데 노력하였다.

안창호는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라고 말하며, 인격혁신이 곧 자아혁신이자 자기개조이며, 이것은 곧 민족개조로 이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안창호의 교육 사상은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에 그 목적이 있었고, 그가 세웠던 점진 학교, 대성 학교, 동명 학원 등의 학교 교육에 반영되었다.

1911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안창호대한인국민회의 활동에 참여하였고, 1913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의 부흥을 위해 활동할 흥사단(興士團)을 결성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에는 상해 임시 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취임하여, 각 지역 독립운동가들을 상해로 소집해서 임시 정부를 통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방략을 놓고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팽배한 대립 속에 중재 역할을 하며 내각 통일을 위해 힘썼지만, 결국 1923년 상해에서 열린 국민 대표자 회의마저 무산되며 실패하였다. 이후 안창호는 1924년부터 만주 지역과 필리핀 지역을 답사하며 독립운동의 근거지와 한국인 이민자들의 정착을 위해 이상촌을 건설할 것을 계획하였지만, 이마저도 여러 여건이 충족되지 못하고 1931년 만주 사변이 발발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1928년에는 이동녕, 이시영, 김구 등과 상해에서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고 ‘개체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개체를 위하여’라는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하기도 하였다.

안창호는 이후 윤봉길 의사의 폭탄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와 대전 형무소에서 실형을 살았고, 가출옥 뒤에도 1937년에 동우회 사건(同友會事件)으로 다시 붙잡혔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이듬해 경성 대학 부속 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죽은 뒤 망우리에 안장되었다가 1973년에 도산공원(島山公園)으로 이장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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