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일제 식민 통치와 민족의 수난

창씨개명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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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 대륙 침략을 본격화한 일제는 우리 민족을 침략 전쟁에 동원하기 위하여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데 박차를 가하였다. 이른바 한국인을 일본의 ‘천황’에게 충성하는 백성으로 동화시키겠다는 ‘황국 신민화 정책’ 혹은 ‘민족 말살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글과 말을 쓰지도 배우지도 못하게 하였고, 우리와 일본이 동일 민족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여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 일선동조(日鮮同祖) 등을 내세웠다. 뿐만 아니라 면(面)마다 신사를 짓고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으며, 우리 민족에게 일본식 성명을 쓰도록 하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창씨개명은 씨(氏)를 새로 만드는 것[創氏]과 이름을 바꾸는 것[改名]을 합한 말이다. 조선 총독부는 1939년 11월 ‘조선 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하고 이듬해 2월부터 이를 시행하였다. 이 정책은 궁극적으로 조선인의 혈통에 대한 관념을 흐려 놓음으로써 민족적 전통의 뿌리를 파괴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창씨개명은 단순히 조선인의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아들이 없으면 사위를 양자로 받아들일 수 있되, 양자로 입적하는 사위는 처가의 씨를 따르고, 성이 다른 타인을 양자로 삼을 수 있되, 입양자는 제 성을 버리고 양가의 씨를 따르도록 하였다. 이것은 부계 혈통 중심의 전통적인 가족 제도가 가(家) 중심인 일본식 씨 제도로 변해야 한다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행 초기에는 창씨개명에 호응한 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그 자녀가 학교에 입학 내지 진급을 할 수 없었고, 식량과 기타 생필품을 배급받지 못했으며, 심지어 기차표도 살 수 없도록 조치하여, 상당한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창씨개명을 한 호수는 전체 호수의 80%에 달했다고 한다. 1945년 광복 직후 일본식 씨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으나 이 법을 규정한 ‘조선 민사령’은 군정법령 21호와 정부 수립 후 제헌헌법 제100조에 의해 그 효력이 지속되다가 구법령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완전히 폐지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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