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민족⋅독립 운동의 전개

이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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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한말 교육인이자 사상가로서, 아나키스트 계열의 항일 독립운동가인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우당(友堂)이다.

그는 1867년 서울 남산골(苧洞)에서 이유승(李裕承)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윤치호(尹致昊),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였다. 신민회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 지역과 서울 지역의 인사들이 주동하여 창립한 전국 규모의 비밀 결사 조직이었다.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이 가시화되자, 이회영은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펼치게 된다. 1906년 이상설(李相卨)과 함께 서전 서숙을 세우고, 무력 투쟁 기지를 설립할 구상을 하였다. 서전 서숙은 학생들에게 역사⋅지리⋅수학⋅정치학⋅국제 공법⋅헌법 등의 신학문을 가르쳤고, 철저한 항일 민족 교육을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목적을 두고 세워진 민족 학교였다. 그런데 1907년에 이상설고종의 명으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특사로 파견되자 이회영이 서전 서숙의 경영을 맡게 되었지만, 자금난과 일제의 간섭으로 1년여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이후 다시 국내로 돌아온 이회영은 전국 학교를 돌며 교육 진흥 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그는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그해 12월에 전재산을 처분하여 온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회영은 길림 지역에 정착하고 경학사, 신흥 강습소 등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해 나갔다. 이후 그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는데, 1924년에는 재중국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을 조직하였고, 1931년에는 항일 구국 연맹의 의장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2년 상해에서 대련으로 향하던 도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결국 옥사하고 말았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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