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민족⋅독립 운동의 전개

고종의 인산 행렬

※ 가운데 사진을 클릭하시면 이미지 슬라이드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은 3⋅1 운동 당시 만세 시위하는 장면과 고종 황제의 장례일인 인산(因山)일의 장면이다. 고종이 1919년 1월 21일에 일제에 의한 독살로 승하하였다는 소문이 떠도는 가운데 민족 대표는 고종의 인산 행렬에 맞추어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이와 함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 Willson)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는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국외의 경우, 신한 청년당(新韓靑年黨)의 김규식(金奎植)이 파리 강화 회의에 참가하여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 사회에 알렸고, 일본에서 조선독립 청년단이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국내에서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가 민족 연합 전선을 결성하고,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민족 대표는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으로 총 33명이었으며, 만세 시위 거사일은 본래 3월 3일로 정해졌었다. 그것은 그날이 고종 황제의 인산일(因山日)이어서 고종의 국장에 수많은 참배객들이 운집할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 대표는 인산일과 일요일인 3월 2일을 피하여 3월 1일로 최종 결정하였다. 그리고 독립 선언서 낭독 장소를 탑골 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시위 운동이 폭력화하여 희생자가 많이 발생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33인의 민족대표는 서울 종로에 있던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학생들과 시민들은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식을 거행한 후, 거리로 뛰쳐나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수십만 명이 참가한 이날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어 3월 20일경부터 4월 10일 사이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5월 말까지도 계속되었다. 시위는 대도시에서 중소 도시로, 그리고 읍면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따라서 처음에 한국 내 경찰과 군대 병력만으로 진압하려 했던 일제는 결국 본국에서 2개 사단 병력을 지원받아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는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7,509명의 사망자와 15,961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46,948명이 체포되었다고 적고 있다. 시위대도 처음엔 비폭력주의에 입각하여 평화적인 만세 시위로 시작하였으나, 일제의 무차별 사격에 분노하여 점차 군청, 면사무소, 헌병 경찰 주재소 등을 습격하고 일본인을 살상하기도 하였다.

3⋅1 운동은 항일 독립운동을 한층 체계화, 조직화,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됨으로써 이후 전개되는 민족 운동에 커다란 분수령 역할을 하였다. 특히 그 영향으로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국권 피탈 이후 단절되었던 역사적인 정통성을 회복한 것이었고, 활발한 외교 활동과 독립 전쟁을 통해 민족의 단결을 도모하였다는 점에서, 3⋅1 운동의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