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민족⋅독립 운동의 전개

태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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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던 태화관이다.

일제의 무자비한 무단 통치와 우리 민족의 생존권까지 위협하는 경제 수탈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항일 독립 운동은 꾸준히 이어졌다. 이 무렵 제1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리하여 전쟁 이후의 뒷수습과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가 포함된 14개조의 세계 평화안이 논의되었다.

윌슨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는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인 모든 약소 국가에게 희망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상해에서 활동하는 신한 청년당은 김규식을 강화 회의에 파견하여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는 등 외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일본에서는 1919년 2월 8일에 유학생들이 조선 독립 청년단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고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정세에 주목하고 있던 국내의 민족 운동가들도 서서히 독립운동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중심이 되었던 세력은 종교계 인사와 학생들이었다. 그래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 그리고 학생들이 연합 전선을 결성하고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33인의 민족 대표는 서울 종로에 있던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학생들과 시민들은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식을 거행한 후, 거리로 뛰쳐나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수십만 명이 참가한 이날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어 3월 20일경부터 4월 10일 사이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5월 말까지도 계속되었다. 결국 일제는 일본으로부터 2개 사단 병력을 지원받아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박은식의 『독립 운동 지혈사』에는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7,509명의 사망자와 15,961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46,948명이 체포되었다고 적고 있다.

3⋅1 운동은 항일 독립운동을 한층 체계화, 조직화,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됨으로써 이후 전개되는 민족 운동에 커다란 분수령 역할을 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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