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민족⋅독립 운동의 전개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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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고 3년간 옥고를 치렀던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다. 그는 충남 홍성 출신의 승려로서,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정옥(貞玉)이며, 용운은 법명이고, 법호는 만해이다.

한용운은 3⋅1 독립 선언서 말미에 ‘자유적 정신을 발휘하고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며,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요구를 발표하고, 질서를 존중하고 주장과 태도를 공명정대하게 하라’는 공약 3장을 남겨,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목표와 행동원칙을 정해 주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 불교계는 국권 피탈 이후 1911년 사찰령(寺刹令)이 반포되자, 전국 사찰이 30본산 체제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본산의 주지는 조선 총독이 직접 임명하였고, 말사의 주지는 각 도 장관에 의해 임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본령에 규정하는 것 외 사찰에 관한 필요한 사항은 조선 총독이 정한다.’는 사찰령의 마지막 조항은 조선 불교계가 무엇 하나 사찰령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던 것이 없었음을 잘 말해 준다.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을 지어 시대의 변화 속에 불교 자체가 개혁해야 할 사안들을 조목조목 주장하는 한편, 일제의 사찰령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리고 나라를 빼앗길 당시 유일한 종단이었던 원종(圓宗)의 종정 이회광이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연맹하려고 하자, 박한영⋅진진응 등의 승려들과 함께 전라도 송광사에서 임제종(臨濟宗) 운동을 벌여 이를 저지하였다(1911~1912). 이 운동은 비록 불교계 내의 문제였지만, 우리의 원종이 일본 조동종의 보호 아래 들어간다는 뜻이었으므로, 항일 정신을 드높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불교계는 일본의 불교 정책에 편승하여 안주하려 하였던 부류가 있었던 반면, 조선불교청년회나 조선불교유신회와 같은 청년조직이 사찰령의 폐지와 정⋅교 분리 운동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한용운신간회의 중앙 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을 맡아 항일 민족 운동을 이끌고, 일제에 대항하는 불교계 비밀 결사 조직인 만당(卍黨)의 당수로서 불교 운동을 지휘하는 등 민족의 독립과 불교계 혁신을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1938년에는 만당사건으로 인해 많은 동지들이 검거되면서 한용운도 고초를 겪었으며, 1940년에는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년 조선인 학도병 출정 반대 운동 등을 전개하며 일제의 탄압에 맞서 활발한 독립 운동을 펼쳤다. 이후 1944년 5월 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별세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훈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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