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민족⋅독립 운동의 전개

대조선 국민군단의 시가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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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14년 6월 하와이에서 창설된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의 시가행진 모습이다.

대조선국민군단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연무부(練武部)를 확대⋅개편한 것으로, 항일무력투쟁에 대비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하여 박용만(朴容萬, 1881~1928)이 1909년 6월 네브라스카 헤스팅스에서 시작한 한인소년병학교의 군사운동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박용만은 우리나라의 독립은 우리나라 사람의 힘으로 군인을 양성하여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미국 내에서 영향력이 있던 이승만이 외교노선을 통해 독립을 주장한 것과는 대립되는 것이었다. 박용만은 나중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외무총장에 선임되었을 때도, 대통령으로 선임된 이승만과 극명한 견해 차이 때문에 외무총장에 부임하지 않았다.

대조선국민군단의 운영원칙은 군단에서 기숙하며 훈련과 학습을 하고, 조별로 농장에 나가 일을 하는 둔전병제(屯田兵制)였다. 즉, 훈령병들은 낮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저녁이 되면 제복을 입고 미군이 쓰는 영문 교본으로 공부하며 정식 군대와 같은 훈련을 받았다. 운영자금은 안원규⋅박종수⋅박태경⋅한치운⋅이치영 등이 파인애플 농장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마련하였다. 그런데 당시 훈련병들은 진짜 총이 아닌 목총을 가지고 훈련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미국 정부가 자국 내에서 외국인들의 군사 활동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설 당시 인원이 103명이었으나, 1916년 10월에는 311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어 1917년경에 해체되었다. 그 이유는 당시 미일(美日)간의 우호 관계 속에 하와이 내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지 못한 점, 하와이 내 불경기와 흉작으로 군영 운영에 필요한 자금 조달이 힘들었던 점, 이승만이 대한인 국민회의 실권을 잡으면서 박용만의 활동 범위가 위축된 점 등이 복합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박용만은 그즈음 실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극동 지역으로 떠났기 때문에 조직 유지가 어려웠다. 그러나 국민군단의 상무적(尙武的) 정신은 박용만에 의해 1919년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으로 계속 이어졌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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