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민족⋅독립 운동의 전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임시 정부 대표단과 한국 공보국 직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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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19년 3월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임시 정부 대표단과 한국 공보국 직원들의 모습으로 사진 앞줄 오른쪽 첫 번째가 김규식(金奎植)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우드로 윌슨(W. Willson)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는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의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일제 치하에 있던 우리나라에서도 3⋅1 운동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했다.

이에 앞서 1918년 상하이에서는 여운형(呂運亨), 김구(金九), 이광수(李光洙), 김규식(金奎植) 등의 한인 청년들에 의해 신한 청년당(新韓靑年黨)이 결성되었다. 세계대전 이후 새로 재편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외교적인 노력으로 독립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완성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대한 독립⋅사회 개량⋅세계 대동의 3가지를 당의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신한 청년당은 1918년 12월에 ‘조선 독립에 관한 진정서’를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하였고, 이듬해에는 세계대전 전승국들의 전후 국제 문제 처리를 위해 개최된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김규식은 3월에 파리에 도착하여 한국 대표부를 설치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한국 민족의 주장』, 『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인쇄물을 출간하여 일제의 침략상을 각국 대표들에게 홍보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식민지 상황이 국제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김규식은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李承晩)과 함께 구미 위원부(歐米委員部)를 조직하여 외교적인 노력을 계속 이어갔다.

신한 청년당은 1923년 6월 이후에 해체되었는데, 동일한 목적과 취지를 가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있었고, 핵심세력들이 공산당에 가담하면서 당세가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해체 이후 주요 인사들은 계속해서 임시 정부의 활동에 참여하였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외교적인 방면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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