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민족⋅독립 운동의 전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임시 의정원 신년 축하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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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21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의 신년축하회 기념사진이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을 하나로 모으고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갈 지도부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따라 1919년 3월에 제일 먼저 연해주에서 대한 국민 의회가 출범하였고, 이어서 4월에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국내에서 한성정부가 조직되었다. 이렇게 여러 군데에서 조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서로 연락이 자유롭지 못했던 이유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곧바로 통합 운동을 전개하였고, 마침내 9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 국민 의회를 통합하여 탄생한 것이다. 한성정부는 인천에서 13도 대표자 대회와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공표된 정부였다. 따라서 국민적 절차에 의해 서울에서 수립되었고, 정부 조직과 각료 구성이 짜임새가 있었다는 점에서 임시 정부의 통합에 정통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시베리아에는 일본군이 진격 중이었고, 상하이에는 서양 열강의 조계지가 많아 외교 활동에 유리한 점 때문에 상하이에 임시 정부가 세워질 수 있었다.

임시 정부는 3권 분립의 원칙에 따라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과 행정 기관인 국무원, 사법 기관인 법원으로 중앙 조직을 구성되었다. 그리고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李承晩), 국무총리에 이동휘(李東輝)가 선임되었다. 대통령제(1919~1925) 이후, 개헌을 통해 국무령제(1925~1927), 국무위원회제(1927~1940), 주석제(1940~1944), 주석 및 부주석제(1944~1945)의 체제로 바뀌면서 독립운동을 지도해 나갔다. 그리고 국내에는 연통제(聯通制)와 교통국(交通局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자금을 모아 조달하게 하였다.

그러나 1921년 즈음부터 국내와 연결되는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에 의해 와해되고, 임시 정부 내에 독립운동의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면서 임시 정부가 침체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독립 전쟁론, 외교론, 실력 양성론 등의 주장이 팽배하게 맞선다거나, 또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대립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임시 정부는 국민대표 회의를 개최하는 등 그때마다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1930년대 이후에는 한국 독립당을 창당하여 삼균주의를 정부 이념으로 채택하는 등 해방까지 안정적으로 독립 운동을 지도하며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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