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민족⋅독립 운동의 전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상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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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첫 번째 청사로서,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의 대한인국민회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마련한 곳이다. 이 사진은 1920년 상해(상하이)에서 발행된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정원 문서』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상해 청사 보창로(寶昌路) 309호’라는 설명과 함께 실려 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을 하나로 모으고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갈 지도부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따라 1919년 3월에 제일 먼저 연해주에서 대한 국민 의회가 출범하였고, 이어서 4월에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국내에서 한성 정부가 조직되었다. 이렇게 여러 군데에서 조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서로 연락이 자유롭지 못했던 이유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곧바로 통합 운동을 전개하였고, 마침내 9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 국민 의회를 통합하여 탄생한 것이다. 한성정부는 인천에서 13도 대표자 대회와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공표된 정부였다. 따라서 국민적 절차에 의해 서울에서 수립되었고, 정부 조직과 각료 구성이 짜임새가 있었다는 점에서 임시 정부의 통합에 정통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시베리아에는 일본군이 진격 중이었고, 상하이에는 서양 열강의 조계지가 많아 외교 활동에 유리한 점 때문에 상하이에 임시 정부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임시 정부는 수립 직후 프랑스 조계지 내의 2층 양옥집을 빌려 건물에 태극기를 내걸고 청사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조계 당국으로부터 폐쇄 조치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여러 악조건 속에서 10여 차례 이상 개인 집이나 기관 사무실 등을 전전하다가 1926년에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보경리(普慶里) 4호 청사에서 6년 동안 안정적으로 임시 정부의 사무를 보았다. 그러나 1932년에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상하이를 완전 떠나게 되었다. 이후 항주, 가흥, 진강, 장사, 광주, 유주, 기강 등을 거쳐 1940년에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으로 중경(重慶)에 안착하여 광복 때까지 5년간 있었다.

임시 정부가 중경에 있었던 시절은 가장 활발하게 독립 운동을 추진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고, 주석을 중심으로 한 단일 지도 체제를 확립했으며,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대일 선전 포고를 발표하여 연합군과 함께 공동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945년 비록 열강의 힘에 의해 광복을 맞게 되었지만, 독립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한 임시 정부의 노력은 민족 단결의 힘을 보여주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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