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민족⋅독립 운동의 전개

물산 장려 운동 시가행진

※ 가운데 사진을 클릭하시면 이미지 슬라이드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은 1922년에 물산 장려가를 부르며 평양 시가지를 행진하고 있는 물산 장려 운동 선전대의 모습이다.

국권 피탈과 더불어 일제의 각종 공장 제품이 우리 민족 일상생활 깊숙이 파고들면서 소비 성향이 높아졌고, 일제 상품에 밀려 민족 산업이 도산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민족 자본과 민족 산업을 육성하여 민족 경제의 자립을 이루자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이었다.

3⋅1 운동 직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제 상품 불매 운동과 우리 상품 애용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것으로 평양 지방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1920년대 초에 조만식을 중심으로 하는 관서 지방의 사회, 종교, 교육계 인사 4~50여 명이 모여 평양 물산 장려회를 발기하였다. 이들은 국산품의 장려와 근검 절약이 민족 산업 육성의 지름길이라 하여, “일상 생활에 다소 불리한 점이 있더라도 모든 일용품을 국산으로 사용할 것”을 호소하며 민족적 항일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서울에서도 종교계, 교육계 지식인들은 물론 상인, 기업인들까지 호응하여 조선 물산 장려회를 조직하였고 전국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서울과 평양에서 일어난 이 물산 장려 운동은 각 사회단체와 언론 기관의 지지와 호응을 받아 확산 되었다. 조선 기독교 청년회에서는 이 운동의 표어를 현상 공모하여,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 등의 표어를 가지고서 물산 장려 운동을 홍보하였고, 강연회를 개최하여 이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군중을 모아 선전 행사를 벌이는 등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이와 유사한 성격의 자작회, 자작 자급회, 조선 상품 소비 조합, 토산 장려회 등 각종 단체가 여러 지방에 설립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운동은 여성계에도 파급되어 여러 지방에 토산 애용 부인회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물산 장려 운동은 일제 당국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고, 일부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이 운동이 일부 민족 부르주아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