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민족⋅독립 운동의 전개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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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전승축하식에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의 모습이다. 윤봉길은 충남 예산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국내에서 농민 계몽과 민족 정신 함양 등을 위한 독립 운동에 매진하다가 그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가야 성공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상하이를 향해 갔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민족 독립운동의 중심이자 대표로서의 위상을 지니고는 있지만, 1920년대 초반부터 독립운동 방략에 관한 노선 차이로 분열과 대립이 심각하였다. 그에 따라 국민 대표 회의를 통해 쇄신해 보려고 했지만, 열악한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항일 독립 운동 기지가 많이 있는 만주가 일본에 의해 점령되기에 이르자, 임시 정부의 중심 인물이었던 김구(金九)는 난국을 타개하고 민족의 사기를 높일 방안으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결성하였다.

한인애국단의 첫 번째 거사로 1932년 1월 이봉창의 일왕 폭살 기도 사건이 있었다. 이 거사로 인해 일본은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상하이를 점령하였고, 그 전승 축하식이 홍커우 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한인애국단의 두 번째 거사를 윤봉길이 준비하였다. 윤봉길은 4월 29일 일본의 전승축하식이 진행되고 있을 때 단상 위에 폭탄을 던졌다. 그로 인해 상해 파견군 사령관이었던 시라카와와 상해의 일본 거류민 단장인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이 현장에서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은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거사 직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2월 일본의 한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윤봉길의 의거는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우리 민족의 의기를 드높이기에 충분하였다. 특히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 1억 인구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찬사를 보내며, 이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이렇듯 윤봉길의 의거는 우리 독립 운동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중국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 독립 운동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직후 임시 정부는 상하이를 떠나게 되었으며, 1940년 충칭(重慶)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여러 곳을 옮겨 다녀야 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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