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민족⋅독립 운동의 전개

이봉창

※ 가운데 사진을 클릭하시면 이미지 슬라이드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 속 인물은 1932년에 일본 국왕을 향해 폭탄을 던졌던 이봉창(李奉昌, 1900~1932)이다. 그는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에서 아버지 이진규(李鎭奎)와 어머니 손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민족 독립운동의 중심이자 대표로서의 위상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1920년대 초반부터 독립운동 방략에 관한 노선차이로 분열과 대립이 심각하였다. 그에 따라 국민 대표 회의를 통해 쇄신해 보려고 했지만, 열악한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항일독립운동 기지가 많이 있는 만주가 일본에 의해 점령되기에 이르자, 임시 정부의 중심 인물이었던 김구(金九)는 난국을 타개하고 민족의 사기를 높일 방안으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결성하였다.

한인애국단의 주목적은 일본 수뇌의 암살에 있었다. 그에 따라 일어난 첫 번째 거사가 1932년 1월에 있었던 이봉창의 일본 국왕 폭살 기도 사건이었다. 이봉창은 1910년대 서울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 점원과 용산역 역부를 지내는 등 평범한 사람이었다. 1920년대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철공소나 가스회사에서 막일을 하였고, 심지어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木下昌藏)라는 일본 이름을 쓰기도 하는 등, 독립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독립 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한 후, 1930년 12월에 중국 상해로 가서 김구를 만나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그런 후 바로 일본 국왕 폭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거사 자금을 마련하는 등 착실하게 준비해 나갔다.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의 막내 동생인 안공근의 집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식을 마친 뒤, 17일 일본 동경으로 향했다. 그리고 1932년 1월 8일, 관병식을 마치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는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체포된 이봉창은 그 해 10월 사형 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의거 당시 중국 국민당의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 보도가 나간 후, 일본은 국민일보사를 습격하여 파괴하는 동시에 중국 정부에도 엄중 항의하였다. 그리고 상하이 조계지 내에서 중국인과 일본인 간의 충돌을 일으킨 후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중국 정부를 도발하여 제1차 상해 사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봉창의 의거는 비록 수류탄이 명중하지 못하여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고, 이후 독립 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