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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과 북로 군정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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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청산리 전투에서 승전한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과 북로 군정서군의 모습이다.

김좌진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그는 자신의 가산을 정리해 학교를 짓고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1910년대부터는 북간도 등지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 후, 1919년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에 가담하였고, 정의단이 대한 군정부로 개편된 후 총사령관에 추대되었다. 북로 군정서군은 바로 이 대한 군정부임시 정부의 권고로 개칭한 부대 명칭이다.

3⋅1 운동 이후 독립군의 국내진입 작전과 봉오동 전투에서 뜻밖의 참패를 당한 일제는 이에 대한 대대적인 설욕전을 계획하였다. 즉 일제는 만주의 한국독립군을 완전 소탕하지 않고서는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대규모의 일본군을 만주에 투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일본군의 만주 진입을 거부하자 일제는 훈춘 사건을 일으켜 출병 구실을 만들었다. 이것은 일제에게 매수된 만주의 마적들이 길림의 훈춘(琿春)을 습격하여 민가를 약탈하고, 일본 영사관을 공격하여 일본인 경찰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일으킨 것은 중국인 마적단뿐만 아니라 한국인, 중국군, 러시아인이 혼합된 국제적 무력 단체라고 조작 발표한 후, 만주에 있는 일본 영사관 및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중국 당국의 허락도 없이 대병력을 투입하였다. 이는 중국에 대한 주권 침해이며 간도에 대한 불법적 침략이었다.

일제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제19사단의 주력 부대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시베리아 파견군 그리고 북만주 파견군 및 관동군 등 2개 사단 정도의 병력을 3개 지대로 편성하여 만주로 침투시켜 한국독립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왔다. 이때 간도 지방에 자리 잡고 있던 한국독립군은 일본군의 계획을 미리 간파하고 백두산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북로 군정서대한 독립군⋅국민회군⋅대한 신민단 등으로 구성된 독립군은 본거지를 떠나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에 집결하였다. 추격하여 오는 일본군과 독립군 간의 전투가 벌어진 곳은 청산리 일대였다.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군은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 전투와 그 이튿날 벌어진 천수평과 어랑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 국민회군, 도독부군, 대한 의민단군 등 독립군 연합 부대도 완루구에서 일본의 대병력과 교전하여 일본군을 크게 격퇴하였다. 이어서 독립군은 26일까지 일본군과 싸워 연전연승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청산리 대첩이다.

임시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이때 일본군의 피해는 사망이 1,200여 명, 부상이 2,1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봉오동 전투청산리 대첩에서 크게 패한 일본은 그 보복으로 1920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간도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무참히 죽이고 가옥을 불태우는 간도 참변을 저질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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