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민족⋅독립 운동의 전개

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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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金元鳳, 1898~1958)은 군인이자 독립운동가로서, 의열단과 조선의용대 등을 이끌었고, 해방 이후 정치가로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 호는 약산(若山)이며, 최림(崔林)⋅이충(李冲)⋅진국빈(陳國斌)⋅천세덕(千世德) 등의 다양한 가명을 쓰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단일한 독립 투쟁의 중심적 조직을 건설하는 것과 함께 국제적 조건을 이용하면서도 독자적인 무장 독립 투쟁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상해에 결성되었고, 만주나 연해주 등지에서 활발하게 독립군의 무장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반면에 소수의 의⋅열사로 일제의 요인을 암살하거나 기관을 파괴하는 단체도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의열단(義烈團)이다.

의열단(義烈團)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김원봉이 중심이 되어 암살⋅파괴⋅폭동 등의 운동 방략을 가지고서 독립을 쟁취하려 조직된 소수 정예의 비밀 단체였다. 의열단(義烈團)은 ‘오파괴(五破壞)’라고 하여 조선 총독부동양 척식 주식회사매일신보사⋅각 경찰서⋅기타 왜적의 중요 기관을 파괴의 대상으로 설정하였고, ‘칠가살(七可殺)’이라고 하여 조선 총독과 고관⋅일본 군부 수뇌⋅대만 총독⋅매국노⋅친일파 거두⋅적탐⋅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을 암살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의 주요 성과로는 1920년 박재혁(朴載赫, 1895~1921)의 부산 경찰서 투탄, 1921년 김익상(金益相1895~1925)의 총독부 청사 투탄, 1923년 김상옥(金相玉, 1890~1923)의 종로 경찰서 투탄, 1924년 김지섭(金祉燮, 1884~1928)의 일본 황궁 투탄, 1926년 나석주(羅錫疇, 1892~1926)의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 투탄 등의 의거를 들 수 있다. 한편 김원봉은 의열단의 단장으로서 의열단의 독립운동 이념과 방략을 정립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신채호에게 부탁하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1923년 1월 발표된 ‘조선 혁명 선언’이다. 선언문에서는 ‘조선 혁명’의 목표로서 이족 통치, 특권 계급, 경제 약탈 제도, 사회적 불평균, 노예 문화를 파괴하고, 고유의 조선, 자유의 조선, 민중적 경제, 민중적 사회, 민중적 문화를 ‘민중 직접 혁명’의 방식으로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의열단은 1923년 말부터 조직 내용과 운동 방향을 둘러싸고 내부 노선 대립 및 분화가 진행되었는데, 김원봉은 폭탄 거사식 운동 방법만으로는 성공보다 실패가 많았고, 충격 효과는 컸을지라도 실제적 성과는 크게 내지 못했다는 반성 하에서 의열단의 방향 전환을 모색하게 된다. 대중 운동에 대한 자각과 체계적인 군사 조직의 결성과 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은 1926년 초에 중국의 황푸 군관 학교(黃埔軍官學校)에 입학하고, 군사 교육을 받은 후 중국 혁명 세력과 연계하여 공동 투쟁에 들어갔다. 한국 혁명 청년회를 결성하였고, 1930년을 전후하여 조선 공산당 재건 운동에 관여하기도 했지만 이는 독립운동을 위해 공산주의자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였고, 코민테른과는 거리를 둔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활동은 코민테른의 영향 하에 있던 사회주의자들에게 배척을 받았다.

1932년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혁명 간부 학교를 개교하고 교장에 취임하여 독립운동 간부들을 양성하였다. 당시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 내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는데, 김원봉은 한국 독립운동의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중국 공산당보다는 중국 국민당과 협력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고, 그와 중국 국민당과의 협력 관계는 광복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35년 의열단한국 독립당 등 5당이 통합하여 조선 민족 혁명당이 결성될 때 이를 주도하여 서기부장에 취임하였고, 1937년에는 총서기가 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관내의 좌파세력을 연합하여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하였고, 1938년 무장부대로서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여 총대장으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이를 조국 독립의 기회로 인식하고 그가 이끄는 조선 민족 혁명당임시 정부 참여를 선언하였다. 조선 의용대 대원들이 상당수 북상하자, 1942년 남은 조선 의용대 대원들을 한국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면서, 한국 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에 취임했다. 1942년 10월 임시 정부 임시 의정원에 참여하였고, 1944년 임시 정부의 군무부장에 선임되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1945년 12월 2일 임시 정부 제2진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1월 신탁 통치 문제로 좌우가 분열하자, 우익 계열의 비상 국민 회의에서 탈퇴하고 좌익 계열의 조선 민족주의 민주전선에 참여하여 의장에 선임되었다. 1947년 6월 조선 민족 혁명당을 조선 인민 공화당으로 개칭하고 정치 활동을 하다가 1948년 월북하였다. 북한정권에서 국가 검열상, 노동상 등에 취임하였고, 최고 인민 회의 상임 위원회 부위원장에도 선임되었으나, 1958년 김일성을 비판한 연안파(延安派)가 숙청되면서 그도 숙청당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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