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사회 운동과 민족 문화의 발전

박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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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한말⋅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학자로서, 애국계몽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의 모습이다. 황해도 황주 출신으로 자는 성칠(聖七), 호는 겸곡(謙谷)⋅백암(白巖)이다.

그는 일찍이 성리학을 공부하여 명망을 얻고 위정척사 사상을 갖고 있었지만, 대한제국 시기 독립 협회의 사상과 활동에 영향을 받고 개화사상으로 전환하였다. 이후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주필을 맡아 일제의 침략상을 비판하고 자주 독립 정신을 고취시키는 한편,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여러 분야에 걸쳐 일본 통감의 간섭과 통치를 받게 되자, 전국적으로 항일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개화 사상에 눈뜬 진보적 지식인들이 국권 수호를 위해서는 의병 투쟁 보다 실력 양성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고, 장지연⋅윤치호 등이 대한 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교육 진흥과 산업 육성 등을 통한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박은식은 자신이 주필로 있던 『황성신문』과 『대한 자강회 월보』 등에 애국 계몽과 관련된 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다. 1907년에는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동휘(李東輝) 등이 비밀 결사 조직인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자, 여기에 가입하여 주로 교육⋅출판 부문에서 활동하였고, 역시 『서북 학회 월보』 등의 주필로서 많은 애국 계몽 논설을 게재하였다.

국권이 피탈된 후, 박은식은 주로 중국에서 활동하며 민족 정신과 독립 정신을 고취시키는데 노력하였다. 처음엔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고 박달 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여 동포들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한편,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와 같은 중국 근대 인사들과 교류하며 홍콩에서 『향강(香江)』의 주간을 맡아 보기도 하였다. 이후 1924년 임시 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로 추대되었고,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제2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하였다.

박은식은 민족과 국가의 혼을 강조하였고, 그것의 유지 속에 민족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각종 신문이나 잡지의 주간을 맡아 보며 민족혼을 강조하는 글을 다수 기고하였고, 『한국통사(韓國痛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와 같은 책들을 저술하여 민족의 자부심을 높이고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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