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사회 운동과 민족 문화의 발전

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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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大倧敎)를 창시한 나철(羅喆, 1863~1916)이다.

나철은 전라도 보성 출신으로 본명은 인영(寅永), 호는 홍암(弘巖)이며, 29세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잠시 관직에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이 점차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오기호(吳基鎬), 이기(李沂) 등의 호남 출신 애국지사와 함께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여 구국 운동을 펼쳤다. 특히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직전인 1905년 6월에는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삼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扶助)하라”는 의견서를 일본 정계에 제출하고 3일간 단식 투쟁을 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을사늑약 이후 을사오적을 비롯한 매국노들을 처단하기 위해 자신회(自新會)를 결성하고 거사를 준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10년의 유배형을 받고 무안군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 이후 고종의 특사에 의해 1908년에 풀려나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지만, 큰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렇게 정치적인 구국 운동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민족 종교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즉, 나철은 1909년 1월 15일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선포하고, 초대 교주인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였다. 이후 1910년에 대종교로 교명을 바꾸고 교세를 확장해 나갔지만,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게 된다. 더욱이 일제는 1915년 10월에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면서 본격적으로 민족 종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대종교도 존폐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분함을 참지 못한 나철은 결국 1916년 8월 15일에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서 일제에 항의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나철의 대종교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 단체에서 국권 회복과 근대 민족 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전통 종교인 동학은 천도교로 개칭하고 민족 의식 고취에 노력하였으며, 불교계도 유신론을 내세워 불교의 자주성 회복과 근대화 운동을 추진하였다.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와 기독교도 근대 시설을 갖추고 의료 활동과 교육 활동을 통해 근대화와 민족의 계몽 의식 고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종교인들의 활동은 3⋅1 운동 당시 독립 선언서를 발표했던 민족 대표 33인에 다수 포함되기도 하는 등,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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