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사회 운동과 민족 문화의 발전

형평 운동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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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조선 형평사(朝鮮衡平社)가 형평 대회를 알리는 포스터이다. 형평(衡平)은 백정이 사용하는 저울로서, 백정들은 모든 사람이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평등 운동인 형평 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 시대 내내 천대를 받았던 백정은 1895년 갑오개혁 당시 공식적으로 신분해방을 맞았지만, 사회적인 편견이나 차별이 하루 아침에 사라진건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 총독부백정호적에 등재하면서 도한(屠漢)이라는 붉은 글씨를 써넣어 제도적으로 차별 정책을 유지하였다. 이렇게 백정은 그 신분이 호적에 기입될 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이 보통학교에 들어가는 입학원서에도 신분을 기입하도록 되어 있어 여러 가지 차별과 멸시를 여전히 받고 있었다.

특히 아동들이 백정이라는 신분 때문에 입학이 거부되거나, 설사 입학이 되더라도 주위로부터 배척을 받아 중도에 퇴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이 3⋅1 운동 이후 교육열이 고조됨에 따라 백정 신분 아동들의 입학률이 높아지게 되자 커다란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백정들은 차별대우에 항의하여 조선 형평사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형평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형평사는 1923년 경남 진주에서 처음 조직된 이래 청년, 여성, 농민, 노동 등 각종 사회단체가 동참함으로써 그 열기가 고조되어 갔다. 형평운동은 당시 일본에서 천민 신분이던 부락민들이 수평사(水平社)를 조직하여 수평 운동을 펴고 있었던 사례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형평운동에는 백정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고, 회원 교육을 위한 야학과 강습소를 설치하는 등의 계몽 운동과 백정들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운동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평 운동에 반대하는 반형평 운동도 거세게 일어나, 형평사의 사무소를 습격한다거나 형평사 회원이 파는 고기의 불매 운동을 벌이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한 형평 운동 내부에도 신분 해방에 중점을 두는 온건파와 계급 투쟁의 측면을 중시하는 급진파가 대립하여 끝내는 해소론까지 나타나기도 하였다. 결국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일제의 간섭과 탄압도 극심해져 그 활동이 약화되었고,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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