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근대사회 운동과 민족 문화의 발전

조선 노농 총동맹 창립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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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24년에 결성된 조선 노농 총동맹의 창립총회 당시 기념사진이다.

1920년대는 일제의 식민지 공업화 추진과 민족 기업의 설립으로 공장 수가 늘어나고, 노동자의 숫자도 크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노동 환경은 열악하였고,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아야 했다.

한편, 노동 문제 만큼이나 심각했던 문제가 바로 소작 쟁의로 나타난 농민 운동이었다. 1910년대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과 1920년에 시작된 산미 증식 계획은 농민의 몰락을 가져와 소작농으로의 전락을 가속화시켰다. 1923년부터 1년 넘게 전개된 암태도의 소작 쟁의 사건은 당시 농촌 사회와 농민들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래서 1922년에 결성된 조선 노동 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는 1923년 9월에 조선 노농 총동맹을 발기하고, 이듬해 4월에 167개 단체, 204명의 대표가 모여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이것은 조선 노동 연맹회측에서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을 겸한 노동 운동을 계획하고, 연맹 조직을 보다 강화하겠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새로 결성된 조선 노농 총동맹은 전국에 260여 노농 단체와 5만 3천여 회원을 거느릴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다. 이 단체는 노동 계급을 해방하여 완전한 신사회를 실현하고, 단결하여 자본 계급과 끝까지 투쟁하며, 노동 계급의 복리 증진과 경제적 향상을 도모한다는 내용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강령에서 일제의 지주적 수탈에 대한 투쟁의지가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노농 총동맹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각종 쟁의에 개입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쟁하였다. 또한 기관지를 발간하고 청년 운동과 제휴하였으며, 민족개량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동아일보』의 불매운동을 결의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사회주의 계열 지도부의 분열로 인하여 위기를 맞게 되었고, 마침내 1927년 9월에 조선 공산당에 의해 노동 총동맹농민 총동맹으로 분리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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