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책 이야기
난중일기(亂中日記)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영웅

우리가 알고 있는

    장군 이순신

그동안 알지 못한

    인간 이순신

 종일 비오다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갑오년(1594년) 5월 9일

 새벽에 곽란이 일어났다

 몹시 아파 인사불성이 되었다

 앉아서 밤을 새웠다

        정유년(1597년) 8월 21일

전장의 한 가운데

손수 먹을 갈아 써내려 간

7년의 기록

난중일기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책의 친필본

13만 여 글자에 담은

    난중일기

그 첫 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맑다

 ……

 다만 어머니를 떠나

 남쪽에서 두 번이나 설을 쇠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길이 없다

        임진년(1592년) 1월 초1일

그 해 봄

명나라로 향하는 길을 내어달라며

조선을 침략한 일본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나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달려들어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포들을 우레같이 쏘아대니

 적들이 무서워서 물러나는데

        임진년(1592년) 5월 29일

 한꺼번에 쳐서 깨뜨리니

 활에 맞아 죽는 자가 부지기수요

 왜장의 목도 일곱이나 베었다

        임진년(1592년) 6월 5일

 이 틈을 타서

 모든 배를 몰아 일시에 무찌르니

 적들은 세력이 분산되고 약해져서

 거의 섬멸하게 되었다

        계사년 (1593년) 2월 22일

왜적이 두려워한

유일한 길

그러나

각도의 군마가

많아야 오천을 넘지 못하고

양식도 거의 다 떨어졌다고 한다

        계사년(1593년) 6월 3일

영남의 여러 배에 사부 및 격군이

거의 다 굶어 죽겠다는 말을 들으니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갑오년(1594년) 1월 19일

여러 배에서 옷 없는 사람들이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추위에 떠는 소리는

차마 듣지를 못하겠다

군량미조차 오지 않으니 더욱 민망스럽다

        갑오년(1594년) 1월 20일

붓으로 휘갈겨 쓴

전쟁의 긴박감

차마 다 풀지 못한

장수의 고뇌

그리고

 바다에 달은 밝고

 잔물결 하나 일지 않네

 물과 하늘이 한 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부는구나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민다

        계사년(1593년) 7월 9일

간결하고 수려한 문체

가장 상세하고 생생한

임진왜란 해전의 기록

국보 제76호

2013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

난중일기는

1598년 11월 17일로 끝을 맺는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이다

『난중일기』는 어떤 책인가?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지은 것으로 전라 좌수사가 된 다음 해인 1592년 1월 1일부터 전사 이틀 전인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 동안 쓴 일기이다. 원래 이순신이 쓴 초고본에는 1592년 5월 1일부터 1598년 10월 7일까지의 일기만 있었는데 최근 나머지 망실된 일기가 찾아져 전체 모습이 완성되었다.

표1) 『난중일기』 초고본의 구성
일기 표제 시작하는 날짜 끝나는 날짜 책수
임진일기 1592년 5월 1일 1592년 8월 28일 1
계사일기 1593년 2월 1일 1593년 9월 15일 1, 2
갑오일기 1594년 1월 1일 1594년 11월 28일 3
병신일기 1595년 1월 1일 1595년 10월 11일 4
정유일기 Ⅰ 1596년 4월 1일 1596년 10월 8일 5
정유일기 Ⅱ 1597년 8월 4일 1597년 12월 30일 6
무술일기 1598년 1월 1일 1598년 10월 7일 6, 7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부득이 전장에 출전하여 쓰지 못한 날도 있지만, 7년간 그날 그날의 날씨와 함께 하루 동안 일어난 일과가 자신의 심정과 함께 기술되어 있다. 일기에는 전쟁에 참여한 이순신의 활약상과 함께 가족과 관계된 일은 물론, 상관과 장수 및 부하들 간의 갈등 문제 등이 주로 기술되어 있고 아울러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과 관련한 내용도 담겨 있다. 이 밖에 전쟁을 수행하며 느낀 심경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변화되고 있음도 잘 드러나고 있으며, 전쟁으로 고통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애환과 무능한 조정과 관리에 대한 탄식 등이 가감없이 잘 드러나 있다.

간행부터 세계 기록 유산이 되기까지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중에 이순신이 직접 초서(草書)로 쓴 기록이다. 아무래도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간편하게 쓰기 쉬운 초서로 필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초서란 한자를 간략하게 흘러 쓴 것으로 알아보기 무척 힘든 글씨체이다. 따라서 후대에 이를 해독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읽기 힘든 『난중일기』 초서본에 대한 해독은 정조 때인 1795년(정조 19)에 처음 이루어졌다. 이때 초서가 정자로 해독되어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14권이 나오게 되었는데 『난중일기』는 총 14권 중 5권부터 8권 사이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이 『난중일기』 전서본은 원문 그대로 수록된 것이 아니라서 누락된 글자도 있었고 잘못 읽은 글자들도 있었다. 그 후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초고본을 다시 해독하여 『난중일기초(亂中日記草)』를 간행했는데, 1795년의 전서본에 비해 내용상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이 두 차례의 해독 작업을 통해 초고본이 정자(正字)로 활자화되면서 이 두 활자본이 후대 『난중일기』 연구자들에게 활용되었다.

1959년 1월 23일에 초고본 『난중일기』는 『임진장초』 및 『서간첩』과 함께 총 9책이 국보 76호로 지정되었다. 이때 지정된 문화재 명칭은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牒壬辰狀草)’이다. 이 초고본은 이순신이 전사한 후 충남 아산의 이충무공 종가에 대대로 소장되어 오다가 현재는 현충사에 『임진장초』와 『서간첩』, 『충무공유사』와 함께 소장되어 있다.

정조 연간에 『난중일기』가 편찬된 이후 300여 년이 흘러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난중일기』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책의 유명세에 비해 읽어 본 사람은 많지 않다. 『난중일기』는 주제별 글이 아닌 날짜 순서의 일기 형식이라서 재미나 내용 파악면에서 그다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1965년에 노산 고 이은상 선생이 『이충무공전서』에서 『난중일기』 부분을 국역했지만 거의 읽히지 않았고, 1989년에 다시 『이충무공전서』를 번역했지만 여전히 접근하기 어려운 책으로 남아 있다. 근래 교감 완역본까지 나왔지만, 이 책을 다 읽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중일기』는 민족의 성전(聖典)으로서 역사적 사실과 학술 연구 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아울러 전쟁 중에 지휘관이 직접 기록을 남긴 유래를 찾기 힘든 사례라는 점을 들어 2013년 6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난중일기』란 이름은 정조 때 붙여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난중일기』라는 이름의 서명을 이순신이 직접 붙인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붙인 이름이 아니다. 이순신은 13만여 자가 넘는 자신의 일기를 묶어서 연도별로 「임진일기」, 「계사일기」, 「갑오일기」, 「을미일기」, 「병신일기」, 「정유일기」, 「무술일기」란 이름으로 나눠 썼다. 그런 그의 일기들이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200년이 지난 뒤였다. 전란 중의 일기라는 뜻의 『난중일기』란 이름은 정조 때 이순신 문집인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간행될 당시 편찬자인 규장각 문신 윤행임과 검서관 유득공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충무공전서』가 간행된 것은 정조에 의해서였다. 이순신 사후, 그에 대해 가장 관심을 기울인 왕은 정조였다. 정조는 1793년(정조 17) 임진왜란 발발 200주년을 맞아 “충무공의 그 충성과 위무(威武)로서 죽은 뒤에 아직까지 영의정을 가증(加贈: 어떤 인물이 죽은 후에 그 생전의 관직을 재차 올려주는 것)하지 못한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다.”라고 하며, 이순신에게 영의정 벼슬을 내렸다. 아울러 정조는 이순신의 일기와 유고(遺稿)를 모아 한 책으로 만들도록 명하였는데, 이것이 2년 뒤인 1795년에 『이충무공전서』라는 이름으로 간행된 것이다. 간행의 의의는 『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밝혀져 있다.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를 발간하였다. 이에 앞서 내각에 명하여 이순신의 옛날 행적 및 유고(遺稿)를 모아 한 책으로 만들도록 명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편찬해 올리니, 하교하기를, “이번 일은 충의를 드높이고 공로에 보답하며 무용(武勇)을 드러내고 공적을 표창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편집할 때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관심을 표명했었으니 이제 인쇄할 때에 와서도 역시 특별한 조치가 있어야 마땅하다. 이제 내탕(內帑)의 돈 5백 민(緡)과 어영(御營)의 돈 5백 민을 내려주어 책을 인쇄하는 비용을 보조하도록 하라.”(『정조실록』 정조 17년(1793) 7월 21일)

조선 시대에 국왕의 주도로 개인 문집이 편찬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14권의 『이충무공전서』는 『난중일기』를 포함하여 이순신과 관련된 모든 저술을 총망라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집이었다. 더욱이 정조는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 발간 외에도 이순신에 대한 현창 사업을 더욱 확대하여 이순신을 유현(儒賢)으로 격상시켰다. 정조는 이순신을 영의정으로 가증하는 한편, 직접 신도비를 지어 이순신의 묘소에 건립하기도 하였다. 이순신 현창 사업은 왕권 강화라는 정치적인 목적과 함께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임진왜란 극복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난중일기』에 담긴 전쟁의 기록

임진년(1592) 1월 1일(음력)부터 시작되는 『난중일기』는 어머니를 떠나 근무지에서 설을 쇠는 감회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임진년은 익히 알고 있듯이 임진왜란이 시작되는 해로 옥포·당포·한산도·부산포 해전이 있던 시기이다. 『난중일기』 앞부분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국가나 개인 제사가 있는 날 외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공무에 열중하고 있는 이순신의 일상이 담겨 있다.

이순신은 1591년 2월 당시 우의정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임진왜란 1년여 전부터 전쟁 대비를 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성곽과 해자(垓字)를 수축하는 등 방어 준비와 각 진영들을 순시하는 내용들이 등장한다. 특히 전쟁이 일어나기 1개월여 전에는 당시 좌의정 유성룡의 편지와 함께 『증손전수방력(增損戰守方略)』이라는 책을 전달받고 부하 장수들과 밤새 연구하고 토론하는 장면도 나온다.

『난중일기』에서 임진왜란의 기록이 최초로 찾아지는 날짜는 1592년 4월 15일이다. 4월 13일 왜군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지 이틀 지난 뒤이다. 이 날(임진년 4월 15일) 『난중일기』에는 왜선 90여 척이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했다는 영남 우수사 원균이 보낸 통첩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5월 2일 이순신은 남해 쪽 진영이 왜적 소식과 함께 흩어졌다는 말을 듣고 통탄하며 여러 장수들은 목숨을 다해 싸울 의지를 불태웠다.

사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참전했던 모든 해전이 다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이순신이 처음 참전한 옥포 해전은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난중일기』에 처음 기록된 것은 5월 29일의 사천포 해전이다. 5월 29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사천(泗川) 선창에서 적선 13척을 모조리 불태워버린 다음, 6월 1일에 고성의 사량도(蛇梁島:통영시 사량면 양지리) 앞바다로 옮겨가서 휴식을 취하며 일본군의 정세를 수색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6월 2일 아침, 일본 수군이 당포 선창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곧바로 출동하였다. 다음은 『난중일기』에 실려 있는 1592년 6월 2일 당포 해전의 장면이다.

아침에 출발하여 곧장 당포 앞 선창에 이르니 적선 이십여 척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우리 배가 둘러싸고 싸우는데 적선 중에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나라 판옥선만 하였다. 배 위에는 누각을 꾸몄는데, 높이가 두 길은 되겠고, 누각 위에는 왜장이 우뚝 앉아서 끄떡도 하지 않았다. 편전과 크고 작은 승자총통을 비오듯 마구 쏘아댔더니 왜장이 화살에 맞고 떨어졌다. 그러자 모든 왜적이 한꺼번에 놀라 흩어졌다. 여러 장졸이 일제히 모여들어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자가 얼마인지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모조리 섬멸하여 남겨 두지 않았다. 얼마 후 큰 왜선 이십여 척이 부산으로부터 줄지어 들어오다가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고는 도망쳐서 개도(介島)로 들어갔다.

『난중일기』 중 임진년에 이어 1593년 계사년 일기에는 용포·견내랑 해전이 담겨 있으며, 1597년 정유년 일기에는 정유재란 발생 후의 거제·안골포·칠천량·벽파진·어란포·명량 해전 등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난중일기』라고 하면 이순신이 참전한 해전 중심으로 기록이 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기의 상당 부분은 해전 기록보다는 날씨와 이순신의 전쟁 준비 등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 하루 하루의 날씨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에 모든 일기에는 빠짐없이 날씨 상태가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전쟁보다는 준비하고 방어하고 정세를 판단하는 이순신의 지략도 담겨 있고, 나라를 바로잡을 인재가 없음을 통탄하는 내용도 실려 있다. 이순신은 그저 통탄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럴수록 거북선을 만들고 준비를 철저히 해야한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맑다. 도망하기 어렵다.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한함을 취하리라.(『난중일기』 갑오년(1594) 11월 28일)

전쟁 기록과 함께 『난중일기』에는 특히 활쏘기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데, 총 264회의 활쏘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이 직접 활쏘기를 했다는 내용과 함께 순찰사와 부하들과 같이 활쏘기한 내용, 자식들의 활쏘기와 부하들의 활쏘기를 구경하는 내용 등 매우 다양하다.

맑다. 늦게 관청으로 나갔다. 정오에 순찰사가 와서 활쏘기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순찰사가 나와 활쏘기를 겨루었는데 열에 일곱을 지고는 섭섭한 기색을 삭이지 못하니 가소로왔다. 군관 세 사람도 모두 졌다. 밤이 되자 술에 취해서 돌아갔다. 가소로웠다.(『난중일기』 병신년(1596) 1월 28일)

한편, 이순신의 일생에서 가장 큰 고난이 닥친 것은 1597년(선조 30) 1월이었다. 그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4월 1일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풀려났다. 그 날의 『난중일기』에 이순신은 위로주를 가져 온 사람들과 흠뻑 취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1일 신유.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대문 밖 윤간의 여종 집에 이르러, 조카 봉․분과 아들 울(이순신의 차남), 윤사행, 원경과 더불어 한 방에 함께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윤 지사가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만났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고, 윤기헌도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기에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마시고서 몹시 취했다. 이순신이 술병째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고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유성룡),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우의정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영도 사람을 보내 문안했다. 술에 취하여 땀이 몸을 적셨다.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난중일기』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내용 중의 하나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효성이다. 일기에는 전쟁 중이어서 생신을 맞은 어머니를 찾아 뵐 수 없어 괴로워하는 효자 이순신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초4일 정사. 맑다. 오늘은 어머님의 생신이었으나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 되겠다.(계사년(1593) 5월 4일)

평안하다고 보내 온 모친의 편지는 전쟁에서 피곤에 지친 장수의 마음을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난중일기』에 90여 차례나 등장하고 있다. 이순신은 1593년인 계사년 5월 4일자에서 어머니의 생신이지만 전장에 있으므로 가지 못하여 평생의 한이라는 내용도 적고 있다. 병환 중인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소식에 밤새 노를 저어 어머니를 찾아 뵙기도 하는 내용이 일기 속에 나온다. 전쟁터에서는 왜군들도 무서워하는 조선 최고의 장군이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평범한 아들이었던 이순신의 모습들이다.

정유년인 1597년은 이순신에게 있어 고난과 아픔의 시련이 연속된 한 해였다. 이 해 4월 13일 일기에는 모친을 마중 나가다가 모친의 부고를 전해들은 심정을 묘사하고 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어 뒤에 대강 적는다.”

모친의 부고를 들은 이순신은 제때에 글을 다 적지 못하였다. 더욱이 정유년 일기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서 파직되고 투옥되었다가 다시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는 중에 또다시 모친상까지 당하는 악순환의 상황에서 기록된 것이었다. 때문에 정유년의 일기 내용에는 다른 어떤 기록보다 필기 상태가 심하게 흘러 있기나 알아보기 힘든 부분이 많다. 더욱이 막내 아들 면이 전사했다는 소식은 그를 더욱 더 고통에 빠지게 하였다.

14일. 신미. 맑다. 새벽 2시쯤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안으로 빠졌으나 엎어지지는 않았다. 막내아들 면이 잡아 안으려는 모양이 있는 듯하였더니 꿈에서 깨었다. ……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였다.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심란했다. 겉봉을 대충 뜯고 둘째아들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慟哭)’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고 통곡했다. 하늘은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한가!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해야 하는구나.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소리쳐 울 뿐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정유년(1597년) 10월 14일)

이순신은 모친과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백성과 전쟁을 걱정하는 장수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는 추운 겨울 바람에 뱃사람들이 동사하지 않을까 걱정했고 제 몸의 안위만 걱정하는 관리에 대해서는 해괴한 짓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 질타했다.

4경(새벽 1시-3시)에 비가 오다 눈이 오다 했다. 바람이 몹시 차가워 뱃사람들이 추워서 얼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진시(오전 7시-9시)에 눈보라가 크게 일었다. 정상명이 와서 보고하기를 무안 현감 남언상이 들어왔다고 했다. 남언상은 원래 수군에 속한 관원인데, 제 몸만 보존하려는 계책을 세우고자 하여 수군에 오지 않고 몸을 산골에 숨긴 지 이미 달포를 넘기더니, 적이 물러간 뒤에야 중벌을 받을까 두려워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그 하는 짓이 매우 해괴하다.(정유년(1597년) 10월 21일)

후대의 평가

『난중일기』는 이순신과 임진왜란 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이며, 동시에 이순신이 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지를 대변하는 책이다. 정조는 국가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을 강조하고 국왕 중심의 정국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규장각을 통해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하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충무공 이순신은 국권 상실의 위기 상황에서 민족 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상징으로 숭상되었으며, 특히 한일 간의 역사적 관계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이자 리더로 높은 평가와 주목을 받았다. 해방 이후에는 국가에 대한 충성 이데올로기 강화 차원에서 성웅(聖雄)으로 승모하는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TV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소설 『칼의 노래』 등을 통해 위인 이순신에서 벗어나 인간 이순신으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인간 이순신을 조명하는 데에는 『난중일기』가 그 중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참고문헌

『정조실록』

이순신 저, 노승석 옮김, 『교감 완역 난중일기』, 민음사, 2010

진윤수 외,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나타난 활쏘기 연구」, 『체육사학회지』 11권 2호, 2006

장시광, 『난중일기』에 나타난 이순신의 일상인으로서의 면모, 『온지논총』 20, 2008

김강녕, 「이순신의 해전: 주요 승전사례와 전쟁사적 의의」, 『군사논단』 69권, 2012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