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책 이야기
서유견문(西遊見聞)

1883년 9월 미국

조선에서 온 대미 사절단 보빙사

일행의 옷차림은 참으로 이상했다

 ……

 모두 기혼인데도 부인을 동반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조선은 여성을 천시한다.

 ……

 조선인은 내외 풍습이 있어

 남이 보는 앞에서 남녀가 절대 키스하는 법이 없다

        - 1883년 9월 13일 시카고 트리뷴

처음 겪는 나라

조선을 바라보는 낯선 시선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도 그랬다

조선인의 눈에 비친

새로운 세상

무도회

 우리나라 풍속에 따라 본다면

 남녀의 분별이 없다고 책망할 자도 있으며……

 음란한 풍속이 있다고 비난할 자도 있을 것이다

        - 서유견문 제16편 中

기차

 그 신기하고도 경이로운 규모와

 신속하고도 간편한 방도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넉넉히 놀라게 하였으며

 마음을 뛰게 하였다

        - 서유견문 제18편 中

서양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책

서유견문

유길준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기행문

프랑스 파리

 서양 여러 나라의 사물이

 거의 파리의 제도를 본뜨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심성과

 자만하는 의기가 매우 심하다

독일 베를린

 남녀를 가리지 않고 맥주를 좋아하여

 그 음주량이 다른 나라 국민들보다 월등히 많다

 날마다 오후가 되면

 술에 취한 사람들이 길가에 비틀거리는데

 크게 떠들거나 노래를 부르며

 심한 경우에는

 길에다 오줌을 누기도 할 정도로

 해괴한 버릇이 많다

스페인 세비야

 다른 나라에는 없는 놀이로

 야만스럽고도 잔인한 풍속이 남아 있다.

 궁지에 빠진

 커다란 소를 찔러 죽일 때에는

 투우장에 가득한 관객들이

 손뼉치고 갈채하는데

 하루에 찔러 죽이는 소가

 열댓 마리나 된다고 한다

서양은 곧 야만이던 시절

유길준이 품었던

    개화

새로운 근대 국가

모두가 평등한 세상

 제왕처럼 귀하고 제후처럼 부유해져도

 첩을 두는 풍속이 없고

 일부일처가

 임금으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하는 제도다

 그러므로 봄날 안방에서나

 가을날 다듬이질을 하면서도

 원한이 없다

        - 제15편〈여자를 대접하는 예절〉中

 묘시(오전 5-7시) 말에 끝난 일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신문에 실려

 그 날 신시(오후 5-7시)에는

 서울에서 300리 떨어진 곳까지 떠들썩했으니

 놀랄만한 일이다

        -제17편 〈신문〉中

개항 이후

점점 거세지는 외세의 압력

그 틈바구니 속에서 흔들리는 조선

나라의 근본인 아이들은

굶주림 추위 질병에 시달리고

배우지 못 해

제 이름 하나 쓰지 못하는

가난한 백성들

뼈아픈 조선의 현실

 외국 사람들과 국교를 이미 맺었으니

 온 나라 사람들

 상하 귀천 부인 어린이를 가릴 것 없이

 저들의 형편을 알지 못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서유견문〉서문 中

총 20편

72개 항목에 담은

서양의 역사

    지리

    정치

    산업

    제도

    문화

그들의 말을 조금씩 알아듣고

그들의 풍속에 조금씩 익숙해지자

학교의 제도를 연구하여

교육하는 깊은 뜻을 엿보고

또 농업 공업 상업에 관한 일을 살펴서

풍성한 현황과

편리한 규모를 탐색하며

군비 학문 법률 조세 등의 법규를 살펴서

미국 제도의 대강을 이해한 뒤에야……

그 중에 조선이 본받을 반한 것

  독립주권(방국의 권리)

  근대적인 정부(정부의 종류, 역할)

  주체적인 인민(인민의 권리)

우리나라 최초

국한문 혼용 단행본

나라의 상하귀천 부인 유학자를 막론하고

알지 않으면 안 되게 때문에

 서투르고도 껄끄러운 한자로

 얼크러진 글을 지어

 실정을 전하는 데 어긋남이 있기보다는

 유창한 글과 친근한 말을 통하여

 사실 그대로의 상황을 힘써 나타내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 1889년 늦은 봄, 유길준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유길준이 꿈꿨던

조선의 모습

그것이 바로 서유견문이다

유길준, 서유견문을 쓰다

『서유견문』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라고 할 만한 기록을 많이 갖고 있다. 한국 최초의 국한문 혼용 단행본, 최초로 구어체로 작성된 책, 최초의 세계 여행기이다. 최초의 기록을 갖고 있는 책답게 이 책을 쓴 유길준도 최초라 할 만한 기록을 많이 갖고 있다. 한국인 최초의 일본 유학생, 최초의 미국 유학생, 최초의 세계 여행자가 바로 그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 이 책과 저자에게 첨가할 기록은 바로 근대 주권 국가의 운영 시스템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소개한 최초의 단행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이 『서유견문』을 단순한 여행 기록만으로 볼 수 없게 하는 이유이다.

『서유견문』이 어떠한 의도에서 서술된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유길준이 『서유견문』을 쓰게 된 경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길준은 1856년 서울 계동에서 태어났고, 14세의 이른 나이에 경주 김씨를 아내로 맞았다. 외조부 이경직(李耕稙)의 소개로 박규수 문하에서 서양의 인문 지리에 대한 정보를 소개했던 중국책 『해국도지(海國圖地)』 등을 탐독하면서 조선 외부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가 한국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된 계기는 1881년 일본의 근대화 내용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조사 시찰단의 일원이 되면서였다. 중전 민씨의 양자였던 민영익의 천거로 일본에 간 25세의 유길준은 당시 일본 근대 사상가로 명성이 높았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운영하고 있었던 게이오 기주크(慶應義塾)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서양의 지리서, 서양 사상 소개서 등을 접하게 되었다. 특히 『서유견문』을 작성할 때 중요한 참고서 중의 하나였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西洋事情)』을 접할 수 있었다.

유길준이 유학한 지 1년 반 정도 되었을 때인 1883년 여름 조선에서는 임오군란이 발생했고, 그는 유학 생활을 접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에서 그는 박영효와 함께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 발간을 추진했다. 그러다가 1883년 친분이 두터웠던 민영익이 조미조약 직후 미국에 보빙사절단으로 가면서 그의 수행원으로 미국에 갔다. 그리고 1884년 국비 유학생이 되어 Governer Dummer Academy(대학 예비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사회진화론을 일본에 전파한 피바디 박물관장인 모오스(Morse,E,S)에게 개인 지도를 받았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유길준이 서양의 문화, 사상 등을 알고, 근대 주권 국가의 운영 시스템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김옥균과 친분이 있었던 그는 갑신정변 연루자로 소환 명령을 받게 되었다. 1년 반 정도의 미국 생활을 접고 조선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대서양을 건너 영국 등 유럽 각국을 돌고, 인도양을 건너 싱가포르, 홍콩, 일본을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했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곧바로 체포되었는데, 민영익 등의 구명 운동에 힘입어 한규설 집에 가택 연금되었다. 『서유견문』 집필은 가택 연금 직후에 시작되었으며, 가택 연금에서 풀려난 이후인 1889년에 완료되었다.

민영익이 유길준을 도와준 것은 어릴 적 함께 공부했던 인연 때문이기도 했지만, 유길준이 사물에 대한 관찰과 지식 습득에서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사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는 배에서 그는 일본어를 공부하여 고베에 내리자마자 일본어로 유창하게 인사를 해서 주의 사람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미국에 간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길을 잃었는데, 유길준이 유창하게 미국인에게 길을 물어 별 어려움 없이 숙소에 돌아왔다는 내용이 미국 지역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민영익은 그의 영민함을 높게 평가했기에 그가 일본과 미국에 국비 유학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의 견문을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갑신정변의 정치적 격변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서유견문』 서문에서 유길준은 민영익의 도움으로 일본과 미국에서 생활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서양에 대한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것에 보답하기 위해 이 책을 쓴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한문에 정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구어체 문투의 국한문 혼용으로 서술한다고 밝히고 있는 대목에서 우리는 『서유견문』의 저술 의도가 단지 민영익에 대한 보답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스로 밝히고 있지 않는 이 책의 저술 목적에는 1876년 개항, 1882년 조미조약 등으로 세계 각국과 교섭의 길을 열었지만, 여전히 왕조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던 현실을 바꾸기 위해 조선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숨겨져 있다. 그의 숨은 의도는 『서유견문』의 목차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서유견문을 통해 조선을 바꾸려고 하다

총 20편의 72개 항목으로 구성된 『서유견문』은 집필 의도와 관련해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근대 국제 사회에 대한 정보, 두 번째는 근대 국가의 기본 운영 원리와 제도, 세 번째는 근대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서양의 모습이다. 각 부분의 목차와 내용를 살펴보자.

첫 번째는 1편과 2편으로 19세기 말 세계 각국의 인문 지리 정보를 담은 부분이다. 각국의 인종, 무역액, 군사력, 주요 지리 정보를 숫자로 자세히 제시한 후 마지막 부분에서 유길준은 ‘먹을 것이 풍부한 아프리카보다 먹을 것이 부족한 영국이 부강한 이유는 인민이 갖고 있는 지식의 힘’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세계의 나라들이 서로 국력을 키우며 문명화를 다투고 있는데 그 문명화는 국가 구성원인 인민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서술이었다.

조선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던 유교에서는 좋은 나라가 되려면 어진 임금이 인민을 어린아이 돌보듯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인민보다는 통치자인 왕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길준은 세계 각국의 정보를 통해 각국이 서로 국력을 키우며 문명화를 다투고 있는데 그 문명화는 국가 구성원인 인민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했다. 인민이 스스로 국가 발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인민을 어린아이처럼 생각하는 유교적 관점과는 분명하게 다른 것이었다.

두 번째는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는 어떻게 운영되는가를 설명한 부분으로, 3편에서 12편까지, 그리고 14편이 여기에 해당한다. 나라의 권리, 인민의 권리, 인민의 교육, 정부의 종류와 역할 등을 서술한 내용은 현재 우리나라 헌법에서도 규정하고 있는 국가, 정치 체제, 국민의 권리와 의무 등과 매우 유사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유길준은 한 나라는 내적으로 다른 나라로부터 침해받지 않는 통치권이 있으며, 외적으로는 다른 나라와 동등한 지위에서 외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하면서 근대 국가 주권의 기본 개념을 설명했다. 유길준이 근대 국가 주권 개념을 가장 먼저 서술한 것은 당시 조선의 정치적 현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려 청나라 군대가 들어왔고, 청나라는 이것을 빌미로 조선은 청의 속국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고 있었다. 이에 유길준은 조선이 아직 국력이 약해서 전략적으로 청나라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는 것뿐인데 이것으로 인해 속국이라고 하는 것은 국제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주권 국가의 개념을 모르고 하는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근대 국가 주권 개념을 통해 조선이 독립된 주권 국가라고 설명한 유길준은 이어 명실상부한 주권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한 방법을 설명해 나아갔다. 인민의 권리에서 신체, 생명의 자유,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 재산 행사의 자유 등 이미 프랑스 혁명을 통해 법제화된 인민 기본권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기본권은 사람이면 누구나 태어나면서 갖는 권리이며, 이미 세계에서 통용되는 원리라고 설명했다. 유길준은 당시 조선의 정치 현실을 고려하여 인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인민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임은 부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신분제가 유지되고 있었던 당시 조선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유길준의 이러한 주장은 매우 혁명적인 것이었다. 물론 1884년 갑신정변의 정강에는 '인민 평등권'제정을 주장하기도 했고, 갑신정변 주도자로 일본에 망명했던 박영효는 1888년 일본에서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군권(君權)을 축소하고 민권(民權)을 확대해야 한다고 건의하기도 했다.

인민 기본권 개념은 갑신정변 세력과 유길준이 이미 수용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김옥균이나 박영효와 달리 유길준은 인민 기본권의 기본 개념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유교의 사상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함으로서 유교 사상에 깊게 젖어 있었던 당시 지배층과 지식인들이 이 개념을 수용하기 쉽도록 설명하려 했다. 더구나 인민 기본권을 토대로 정부의 조직과 역할, 의회 제도와 대통령제 등을 설명하고 법률을 통해 인민 기본권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주권을 굳건히 지키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유길준은 근대 주권 국가의 기본적인 운영 원리를 설명하면서도 당시 조선의 정치적 현실을 고려하여 수용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대통령제와 인민 참정권에 대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민 기본권과 정부의 역할을 통해 근대 주권 국가의 운영 체계를 세우고, 여기에 유교적 덕목인 충(忠)을 강조함으로서 국왕의 통치에 인민이 순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뒤이어 조선에서 시급하게 받아들여야할 제도들을 설명했다. 납세제도, 국채발행, 징병제, 주식회사 등 근대 국가의 경쟁력을 제고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설명함으로서 당시 조선의 제도를 변화시켜보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분은 『서유견문』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이처럼 많은 양을 할애하면서 근대 주권 국가의 운영 원리와 제도들을 설명한 것만으로 우리는 유길준이 전제 군주제였던 조선의 시스템을 바꾸고 싶어하는 개혁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서유견문』을 통해 자신의 개혁 방향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서유견문을 통해 근대 문명을 펼쳐놓다

『서유견문』의 세 번째 부분은 문명의 이기라고 할 수 있는 기차, 전화, 신문, 우편 등에 대한 소개, 국가가 운영하는 공공 시설인 박물관, 도서관, 고아원, 맹아원, 정신병원 등에 대한 설명, 그리고 각국의 주요 도시의 모습과 결혼, 육아 등 도시민의 생활에 대한 것이다. 이 부분이 본격적인 서양 여행기이며 문화 탐방기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 대한 정보를 나열하기에 앞서 유길준은 "조선의 문화적 관점에서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전달하니 여기에 대한 판단을 독자에게 맡긴다."고 밝혔다. 일본과 미국의 문화를 처음 접하면서 문화적 충격을 이미 경험했던 유길준은 되도록 서양의 문화를 충실히 소개하여 독자 스스로가 수용과 이해의 폭을 결정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양 문화에 대한 소개가 근대 국가의 기본 운영 원리와 제도를 소개한 다음에 배치된 것은 유길준의 또 다른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즉, 근대 국가의 운영 원리와 제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되고 있으며,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 내용 대부분이 눈에 띠는 발전상 또는 세련되고 우아한 생활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서양 국가의 모습을 통해 명실상부한 근대 주권 국가의 모범적인 모델을 제시하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서양 여행기에 등장하는 서양인의 생활상은 당시 유럽의 중산층 가정을 모델로 하고 있었다. 기독교적 윤리관이 몸에 밴 이들의 생활은 매우 정돈되고, 교양있고, 세련된 것이었고, 그에 따른 예의 범절 또한 절도가 있었다. 여기에는 낯선 동양의 나라 조선에서 온 유길준을 친절하게 대했던 스승 모오스와 그의 가족과 함께 지낸 경험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결혼, 육아, 예절 등 미국 중산층을 기준으로 서술된 서양 가정의 모습은 조선의 서민 가정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윤택하고, 절도 있고, 여유로웠다.

그러나 유길준이 서양을 여행했던 19세기 유럽은 소득 격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빈민, 비위생, 질병 등으로 노동자의 생활이 매우 비참했던 시기였다. 깨끗하고 우아한 파리의 모습은 프랑스 혁명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도심을 강제 철거하고 강압적으로 정비한 것이었다. 물론 『서유견문』에도 영국의 빈민굴이 언급되기도 했고, 프랑스 혁명이 서술되기도 했다. 그러나 유길준의 서술 태도를 보면, 그는 서양의 어두운 부분을 주목하지 않았다. 유길준은 서양을 발전되고 활기찬 생활이 이루어지는 곳,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이기(利器)들을 활용하면서 자유롭고 윤택한 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서술하였던 것이다.

여행자는 일반적으로 그 지역의 사회적 관계와 갈등보다는 그 지역의 발전상 또는 자신의 문화와 매우 이질적인 것을 먼저 인지하는 단순한 시선을 갖고 있다. 『서유견문』의 세 번째 부분도 일반적인 여행자의 시선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서술에서 근대 주권 국가가 이룩한 문명화된 생활상에 대한 동경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는 점은 유길준의 서술 의도가 엿보인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영국의 빈민굴에 대해서는 크게 부정적이지 않았던 것에 비해 스페인의 투우에 대해서는 야만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대목 등은 영국이 스페인보다 훨씬 문명화되었다는 관점이 베어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프랑스, 영국에 대한 매우 우호적인 서술 관점에서 우리는 다양한 문화를 펼쳐놓으면서도 스스로 서열을 매기고 있는 유길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최고로 문명화된 나라는 유길준이 조선을 바꾸려 할 때 가장 기준이 되는 모델이 되기 때문이었다.

서유견문을 통해 자신을 변호하다

『서유견문』에는 조선을 바꾸려는 의도 이외에 또 다른 하나의 숨은 의도가 담겨져 있었다. 그것은 갑신정변 연루자라는 비난으로부터 유길준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도가 분명하게 표출된 부분이 14편에 있는 개화의 등급이다.

갑신정변은 고종과 왕후 민씨의 세력이 좌우하고 있었던 의사 결정 구조를 폭력적으로 바꾸려는 시도였기 때문에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춰졌다. 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에 망명했지만, 미처 망명하지 못한 홍영식, 박영교 등은 비참한 죽음을 맞았고, 그들과 행동을 같이했던 행동대원들을 체포된 후 참수형에 처해졌다. 갑신정변의 후폭풍 속에서 목숨을 건진 유길준은 갑신정변과의 관계를 해명해야 했고, 나아가 폭력적 방식이 불러온 불행한 결과를 확인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조선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길준은 정치 권력에 도전하기 보다는 인민을 교육시켜 점진적으로 사회를 바꿔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서유견문』을 통해 알리려고 했다. 이러한 생각이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개화의 등급이다. 세계의 각국이 개화를 다투는 것은 개화가 인간의 삶을 지극히 아름답게 하기 때문이며 개화는 끝없이 계속 발전해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교적 관점에서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되는 것이긴 했지만, 그것이 점차 나아지는 것(발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반면에 유길준은 개화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근대 사회의 발전을 확신했고, 인민이 그 발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서유견문』에 서술된 개화의 종류는 행실의 개화, 학술의 개화, 정치의 개화, 법률의 개화, 물품의 개화로 다섯 종류이다. 그리고 인민은 이 다섯 종류의 개화를 위해 열심히 교육받고, 노동하고, 사업을 일으켜야 하는 존재였다. 인민이 개화의 주체인 만큼 나라의 개화 역시 인민의 개화 정도에 따라 등급이 나뉜다. 인민 대부분이 개화한 나라는 개화, 개화한 인민이 절반인 나라는 반개화, 그렇지 못하면 미개라는 것이다. 나라마나 개화의 정도가 다르고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예전에 개화였던 나라도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반개화나 미개로 떨어지기도 하고, 미개나 반개화의 나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개화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했다.

노력의 여하에 따라 발전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설명은 현재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개인 스스로의 노력이 모아져 한 나라의 문명화가 달성될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유교적 관점에서 나라의 발전은 통치자인 국왕과 국왕을 보좌하는 관료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노력과 국가의 발전이 일치될 수 있다는 너무도 당연한 생각이 『서유견문』을 통해 조선 사회에 유포되면서, 조선 사람들은 점차 근대 국가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알기 시작했다.

개화에 대한 『서유견문』의 설명은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개인 스스로가 노력하면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인민 기본권을 보호받고 개인이 스스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주체라는 생각은 분명 서양의 계몽 개념과 닮아 있다. 그러나 유길준은 이 부분을 설명할 때에도 마치 유교의 수신(修身) 개념을 연상하도록 서술하면서 양반이 행하던 수신을 인민들도 해야 하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서양에 대한 반감이 컸던 당시의 상황에서 유길준은 서양 사상의 주요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유교적 관점과 용어를 사용하여 독자들이 낯설어 하지 않도록 설명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단지 서술의 방식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유길준 스스로도 자신이 학습해왔던 유교의 지식 토대 위에서 서양 사상을 수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급진적으로 서양화 하려는 정치 운동과 거리를 두면서 개화가 점차적으로 인민의 생활 속에 스며들 수 있기를 바랬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유길준은 갑신정변 세력의 것으로 알려진 개화라는 용어를 점차 갑신정변 세력으로부터 떼어내기 시작했다. 서양을 무분별하게 따라하는 것은 '허명 개화(虛名開化)'라고 비판하고 허명 개화는 개화하지 못한 것보다 폐해가 더 크다고 서술하였다. 이것은 갑신정변의 급진적 방식을 비판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자신이 생각하는 점진적 방식이 진정한 개화임을 피력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서유견문』을 통해 제시된 유길준의 개혁은 인민을 계몽함으로서 점진적으로 조선을 바꾸어 나아가는 것이었다. 이것은 『서유견문』이 서술되기 직전 유길준이 경험했던 갑신정변의 비참한 결과에 대한 반성이었으며, 갑신정변 연루자라는 지목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역사적 의의

1889년 완성된 『서유견문』은 곧바로 출판되지 못했다. 청나라의 간섭이 증대되면서 조선의 정치적 현실이 유길준이 생각하는 방향과는 반대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이 진행되면서 제도적으로 조선의 통치 시스템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95년 일본 교순사에서 『서유견문』이 발행되었다. 유길준은 조선에서 갑오개혁에 참여하여 내부 대신 등을 지내면서 교육과 행정 부분에서 개혁을 이끌었다.

그러나 을미사변와 아관파천으로 갑오개혁 세력이 모두 실각하고 유길준 또한 을미사변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체포령이 떨어졌다. 일본으로 망명한 유길준은 그 후 10년이 넘는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서유견문』 또한 조선에서 금지 도서로 유포되지 못하였다.

이 후 1898년 창간된 「황성신문」에서는 유길준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채 『서유견문』의 내용이 게재하였다. 그리고 유길준이 『서유견문』에 피력했던 방향대로 조선 사회에서는 인민에 대한 계몽의 필요성이 크게 제기되었다. 『서유견문』에서 소개한 내용들이 신문을 통해 다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서유견문』의 내용은 조선인이 서양에 대해 알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지식이 되었다.

참고문헌

유영익, 「「서유견문」론」 『한국사시민강좌』 7, 1990

정용화, 「한국 근대의 정치적 형성 : 『서유견문』을 통해 본 유길준의 정치사상」 『진단학보』 89, 2000

한철호, 「유길준의 개화사상서 『서유견문』과 그 영향」 『진단학보』 8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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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