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책 이야기
한국통사(韓國痛史)

#1

1910년 한일강제병합

#2

망국을 아파하는 지식인

스스로 태백의 미친 노예(太白狂奴)라 말한

박은식

"늙어 백발이 된 지금

국가가 존망에 처하게 되어

이제는 조상에 제사조차

지낼 수 없게 되었다."

"거리의 아이나 시정잡배들도

나를 나라 잃은 노예라고

꾸짖는 듯하다."

#3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

#4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없어질 수 있으나"

#5

"역사는 없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

#6

"그것은 나라는 이고,

역사는 이기 때문이다."

#7

"이 보존되어 멸하지 않으면

는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다.

#8

한국통사

박은식

#9

시대의 아픔을 안은

#10

유교적 전통 위의

#11

민족의 단결을 위한

#12

의 폭압적 탄압에 맞선

#13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14

1915년

이를 토대로

를 펴내다

#15

한반도의 자연과 도시

단군부터 고종즉위까지의 역사

대원군의 집권과 외세의 이권 침탈의 역사

독립협회 결성에서 105인 사건까지의 역사

#16

책의 말미에 논설을 실어

에 저항하는

에 대한

#17

에 대한

#18

하고

로 바라보는

역사학적 방법론을 도입한

역사학자로서

#19

야만적이고 기만적인

#20

망국의 원인

에 대처하지 못한 지배층

#21

망국의 원인

으로 무장한

#22

하는

#23

"의 본질을 깨우치는

에 있다"

강조

#24

"나라인 멸망하더라도

역사인 망할 수 없다."

"이 있으면 "

#25

중국 근대사상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 없어 옷깃을

적시곤 했다."

"우리 국민들은 이 책을 읽고

우리나라의 장래 모습이

이처럼 되지 않을지 두려워하고

걱정해야 할 것이다."

#26

하고

를 열망하는

인민에게 보내는

#27

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절대로 저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쓴 책

#28

한국통사

들에게

으로 무장하고

을 딛고

하고 있다.

한국통사

아픔에 공감하다.

"한국의 아픈 역사”란 의미를 갖는 『한국통사(韓國痛史)』는 1915년 상하이 대동편역국(大同編譯國)에서 출판되었다. 중국 근대 대표적인 사상가로 잘 알려진 캉유웨이(康有爲)는 이 책에 대해 공감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서문에 담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가 없어 옷깃을 적시곤 했다."

"우리 국민들은 이 책을 읽고 우리나라의 장래 모습이 이처럼 되지 않을지 두려워하고 걱정해야 할 것이다."

1910년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본은 한반도를 발판으로 중국에 진출하려고 했다. 1912년 일본의 군벌세력을 등에 업은 가쓰라 타로[桂太郞] 내각은 중국 침략을 위해 조선 주둔 일본군 2개 사단을 증설하려고 계획했지만, 다이쇼[大正] 정변으로 무산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그해 8월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 점령지였던 산둥[山東]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1905년 러·일전쟁의 결과로 한국과 남만주를 점령한 일본이 본격적으로 중국 침략을 감행한 것이었다. 일본은 1915년 1월 중국에 대한 독일의 권리를 승계하고, 남만주와 내몽골에 대한 조차를 요구하는 내용의 21개조를 중국에 요구했다.

1913년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대총통선거법을 개정하여 독재체제를 확립한 위안스카이는 굴욕적인 일본의 21개조를 받아들였고, 스스로 중국의 황제가 되려고 했다. 일본과 위안스카이의 독재체제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고 있었던 1915년에 『한국통사』가 중국에서 간행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이 일본의 비인도적 행위를 고발하고,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정신력과 힘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에 강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박은식은 이 책 마지막 부분에 중국 상해 『시사신보(時事申報)』의 논설을 수록하여 중국인 나아가 일본의 폭정에 저항하는 일본인에 대한 공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한국통사』에 인용한 『시사신보』의 내용은 1910년 일본에서 천황암살미수 사건을 조작하여 고토쿠 슈스이[行德秋水]를 비롯한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11명을 사형시킨 ‘대역사건’과 1911년 조선에서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 사건을 조작하여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 민족운동을 탄압했던 ‘105’인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정부가 사회의 행복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국민은 혁명 대열을 않을 것이니 (중략) 만일 혁명이 있다고 한다면 그 잘못된 죄는 정부나 자본가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평화와 인류에게 복이 누려지길 간절히 희망하는 바이며, 우리는 또한 세계의 정부 및 자본가가 약탈을 일삼아 혁명의 화를 불러일으키지 말 것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당시 동아시아 삼국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독재와 수탈에 대한 인민의 반감을 표현하고 있었던 『시사신보』에 대해 박은식은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일본은 침략을 그들의 가장 중심된 정책으로 삼고 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대해 갖는 야심은 다른 나라에 비해 더하다. 그들 자신의 나라 내부에서 일어나는 위험도 이와 같을 것이다. 인도주의로 외국을 대하면 또한 인도주의로 자국민을 대하는 것이다. 장래의 국가는 반드시 공화국 형태를 띠게 될 것이며, 인류는 반드시 평화를 지향해 나갈 것이다. 따라서 모든 정치의 추세를 우리는 반드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은식은 일본의 비인도적인 조선 지배가 일본 국내에서는 비인도적인 군벌의 독재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러일전쟁 이후 강화되고 있었던 군부와 번벌의 독재를 비판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군벌의 비리와 자본가의 약탈에 항거하는 대중 시위로 번져가고 있었다. 또한 일본이 급격하게 산업화를 진행하면서 임금과 생활수준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사회주의사상이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

일본의 야만적인 조선 지배와 중국 침략, 일본 군벌과 중국 위안스카이의 독재는 동아시아 삼국 인민들이 독재, 약탈, 비인도적 행위에 반대하면서 인도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배경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때 발간된 『한국통사』는 침략, 약탈, 독재에 공감하는 동아시아 삼국 인민에게 보내는 한국인의 메시지였다고 할 수 있다.

박은식, 사회의 아픔과 소통하다.

박은식은 1859년 황해도 황주 지방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했다. 그리고 평안도 안주(安州) 태생인 연안(延安) 이씨와 결혼하여 평안도 삼등(三登)으로 이주하면서 황해도와 평안도를 자주 왕래하며 생활했다. 박은식 역시 여느 양반 자제들처럼 과거를 준비했지만, 평안도 향시에 합격한 것이 전부였다.

박은식은 관서지방의 유학적 전통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청년 시절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경화학계의 인물들과 교우하면서 다양한 학맥의 관점을 두루 섭렵했다. 1894년 이전 박은식은 조선 대다수의 유학자와 같은 척사론적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1894년 이후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긴 박은식은 갑오개혁 이후 서양 문명을 소개하는 교과서와 역사서를 읽으면서 점차 국제질서와 세계의 동향을 알게 되었고 유교적 전통 위에 근대문명을 수용하자는 입장의 “개신유학자”로 변모하게 되었다.

갑오개혁 직후 유교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대표적인 역사서 중 하나인 『태서신서(泰西新史)』는 유럽 국가의 독립과 발전상을 보여주면서 세계는 독립된 국가가 서로 평등하게 외교관계를 맺고, 문명발달을 경쟁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이야기했다. 또한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인민이 민권의식을 갖고 스스로 주체로 서야 하며, 통치자가 인민을 위해 새로운 정치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갑오개혁 이후 서양문명의 수용을 주장했던 지식인들은 전제정치의 비인도적 참상을 제거하고 인민을 자주적인 국가발전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 왕과 인민이 함께 통치하는 새로운 정치를 구상했고, 새로운 정치의 모델 중에서 한국적 상황에 맞는 것이 입헌군주제라고 생각했다.

박은식 역시 당시 한국 학계의 이러한 움직임에 공감하면서 학문의 사회적 역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사범학교 교관으로 지냈고 있었던 1900년에는 북학파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주장했던 박지원의 『연암집(燕巖集)』을 출간하는 데 참여했고, 1901년에는 「흥학설(興學說)」을 학부에 제출하여 서양 신문학을 도입하여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고, 종교를 통해 인민을 교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은식이 학문과 종교를 통해 인민의 능력과 정신을 고양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던 이유는 서양의 새로운 지식과 전통의 유교가 서로 조화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이후 서양학문이 밀려드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박은식은 신지식을 수용하려는 지식인들의 개혁에 공감하면서도 자신의 지적 전통이었던 유학의 가치를 버리지 않았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 옛것과 새로운 것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꿈꿨다고 할 수 있다.

교육활동에 전념하던 박은식이 본격적으로 언론인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이후였다. 1904년 창간된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지내다가 1906년 복간된 황성신문의 주필이 되었다. 서우학회를 조직하고 『서우(西友)』란 잡지를 편집했고, 서우학회가 한북흥학회와 통합하여 1908년 서북학회가 되었는데, 그때 발간된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도 활동했다.

갑오개혁 이후 서양의 신지식을 수용하여 자강운동을 펼쳤던 박은식의 생각은 1907년 정미조약 이후 조금씩 변화를 보였다. 1905년 통감부 설치 이후 한국 사회는 일본어 학습붐, 일본인과의 동업, 사적 이해관계의 분출 등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실력양성과 민권신장이란 미명하여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해가는 한편에서는 항일 의병전쟁이 격화되면서 양반과 지주층의 불안, 지방사회의 갈등과 동요가 심화되고 있었다.

1907년을 전후하여 황성신문을 잠시 떠나 있었던 박은식은 1908년 다시 황성신문 주필로 복귀하였고, 심화되는 사회적 동요를 안정시키고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학문적 전통에서 그 해답을 구했다. 대한제국민의 단결을 위해 그리고 일본의 비인도적 침략행위를 비판하기 위해서 유교의 대동사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공자가 꿈꾸었던 세계인류가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갈등과 반목을 비판하고, 도덕질서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동교를 국가의 종교로 세워 인도주의와 평화주의적 가치를 확산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 한층 심화되는 상황에서 그의 대동주의는 자칫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을 희석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기도 했다. 폭력적 저항 형태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그는 일본의 악행에 대해서도 교화와 인도라는 비폭력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일진회는 1909년 12월 일본과의 합방이 대동주의의 실현이라고 주장하고 나서기도 했다.

따라서 박은식은 일진회가 말하는 대동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국가를 파는 도적을 토벌하고, 실력양성에 힘쓰며, 모든 인류로 하여금 대동평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올바른 춘추대의라고 하면서 대동사상이 독립국가와 자강에 기초하고 있음을 설파했다. 그는 일진회가 주장하는 ‘합병’은 춘추대의도 대동사상도 아닐 뿐만 아니라 나라를 팔고, 왕과 인민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했다. 그러나 평화적 방법으로 일본의 침략을 막을 수 없었던 현실 앞에,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함으로서 의병으로서 전쟁을 선포했던 안중근의 행위에 공감하면서 그는 점차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침략, 대한제국민 사이의 갈등과 혼란이 심화되고 있었던 현실을 직시 했던 박은식은 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대안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주변 사람들과 폭넓게 교우하고 사회의 움직임을 민감하게 포착했던 그는 그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그의 사상이 끊임없이 변한 것은 그가 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국혼, 아픔을 딛고 희망을 이야기 하다.

대동평화의 가치를 통해 일본의 침략과 야만적 행위를 비판했지만, 일본의 침략은 강제병합으로 귀결되었다. 강제병합 이후 일본은 한국인의 학회와 언론을 모두 금지시켰고, 박은식이 쓴 서적도 모두 금서로 만들었다.

박은식은 1911년 초 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환인(桓仁)현 흥도천(興道川)에 있는 지인 윤세복(尹世復)의 집에 머물면서 집필활동을 계속했다. 이때 윤세복의 영향으로 그는 대종교의 신도가 되었다. 1912년 상하이로 간 박은식은 『안중근전』을 저술하고 망명 이후 꾸준히 집필해 왔던 『한국통사』를 완성했다. 이 책에 캉유웨이의 서문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상해에서 강유웨이, 양치차오 등 중국지식인들과 폭넓게 교류했기 때문이었다.

『한국통사』는 1894년 이후 서양의 신지식을 수용하고, 당시의 사회적 현실의 문제를 고민해왔던 박은식의 사상적 흐름이 응축되어 있는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사용하던 겸곡(謙谷, 1911년 이전 사용) 또는 백암(白巖, 1911년 이후 사용)이란 호 대신 태백의 미친 노예란 뜻의 태백광노(太白狂奴)란 필명을 사용한 것은 망국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과의 공감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책 1편은 백두산에서 태백산맥으로 연결되는 한반도의 산세를 시작으로 3면의 바다, 강, 산 그리고 8도와 주요 도시의 모습을 묘사했고, 단군을 시작으로 임진왜란의 역사적 흐름을 정리했다. 5천년의 역사, 수려한 영토에 대한 묘사는 2편 1863년 대원군의 섭정에서부터 시작되는 한국의 아픈 근대사와 대비되어 통한의 시대가 더 잘 드러내고 있다.

본격적인 역사서술인 2편은 대원군의 섭정에서 1896년 아관파천과 외국의 이권침탈까지를 다루고 있고 3편은 독립협회의 결성에서 1911년 105인사건까지를 다루고 있다.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의 외교관계, 임오군졸(임오군란, 1882년), 갑신년 혁명당의 난(갑신정변, 1884), 대한독립과 독립당(독립협회운동) 등 인민들의 움직임, 그리고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한국침략 과정 등을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면서 기술하고 있다.

박은식은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사건의 내용과 의미를 보여주는 관련 자료를 풍부하게 제시하고 있으며, 의미와 평가를 내려야 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안(按)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통해 마치 사관(史官)으로서 해석을 내리고 있다. 선악과 시비를 가르는 춘추필법의 역사서술 방식과 방대한 근거 자료들을 통해 망국의 과정을 보여주는 근대 역사학의 서술 방식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통사』를 통해 박은식이 진단한 망국의 원인은 세계의 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통치자와 집권층, 야만적이고 사기적인 일본의 비인도적 침략, 신지식과 용맹으로 무장하여 자주하려는 정신의 부재였다.

기개 있게 집권 했지만 세계정세와 신지식에 어두웠던 대원군, 서양과 조약을 체결하여 열강의 균세를 이용하여 나라를 지키려고만 했지 자강을 실현하지 못한 고종, 새로운 지식과 자주의 기개가 있었지만 섣부른 행동으로 스스로 실패를 좌초했던 갑신정변 세력, 나라의 폐단을 고치고 외세에 반대하는 혁명을 일으켰지만 배우지 못해서 세상의 흐름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나라의 화를 불러일으켰던 동학농민들, 갈등과 반목으로 단결하지 못했던 집권층 등.

박은식은 나름대로 세상의 변화에 대처하려 했던 사람의 행동에서 장단점을 살펴보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스스로 자주하는 정신을 굳건히 하고, 때를 위해 철저히 준비해야 하며, 한국인들이 한마음으로 단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 중에서 그는 독립협회를 가장 아쉬워했다.

"생각컨대(按) 우리나라의 민중 단체 가운데 유력한 것이 세 가지 있는데, 갑오년(1894년)의 동학당, 정유년(1897년)의 독립협회, 갑진년(1904년)의 일진회가 그것이다. 동학당의 폭력과 일진회의 매국은 거론할 필요도 없지만, 단지 독립협회는 유식한 신사의 조직이며, 그 정신도 본받을 만한 것으로서 그 실패는 우리 민족이 통탄해 마지않는 바이다." 독립협회는 인민을 계몽하고, 정치의식을 고양시키고, 정부가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도록 비판하는데 앞장섰던 단체였다. 실력양성을 주장했던 박은식으로서는 폭력적 급진적 방법을 사용했던 동학당이나 일진회 보다는 독립협회의 노력을 그 중에서 가장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독립협회 역시 지식의 기초도 초보적이었고, 성급하게 달성하려고 했다가 실패했다고 보았다. “경솔하고 조급하여 견실한 역량도 없이 헛되이 허영만 꿈꾸면 해의 그림자를 쫒는 것이다”라고 독립운동을 하려면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한국의 독립과 황실의 안녕을 보장할 것이라는 거짓말을 앞세워 침략해 오고, 무력과 힘을 동원해서 힘없는 한국인의 재물을 빼앗고 살생을 하는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의 속임수와 협박, 일본 헌병대가 한국에서 경찰 노릇하면서 자행하는 야만적인 형벌 등. 박은식은 일본의 한국 침략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지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고발했다. 더구나 세계 서양 국가와 비교하여 문명화가 덜된 일본이 한국을 가장 혹독하게 통치하는 것은 과거에 한국이 일본 보다 앞서있었고, 나라도 컸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한국의 역사적 전통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그에게 일본의 야만적 지배는 참을 수 없는 울분과 고통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따라서 그는 일본의 비인도적 행위를 비판하고, 고발했던 한국인들의 기개를 소개하고 있다. 을사오적의 행위를 비판한 상소, 민영환 등의 순국, 최익현의 격문, 민긍호의 의병, 그리고 장인환·정명운의 미국인 스티븐스 사살, 안중근의 이토 사살, 이재명의 이완용 습격 등 이것을 통해 박은식은 기개와 용맹, 비인도적 행위를 처단하는 의로운 행위를 가능케 했던 정신에 주목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통사』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한국인의 시조 단군, 공자의 가르침을 한국에 전한 기자(箕子), 공자의 한국인 제자 소연(小連)과 대연(大連), 삼국시대 세속 5교, 그 후 유교와 불교의 역할, 한글의 우수성 등을 소개하면서 한국 민족의 역사적 정체성을 구상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이 종교과 문화를 통해 계승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이 비인도적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살아 있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는 혼에 속하고, 식량, 군사력은 백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혼이 있는 자는 백에 따라서 죽고 살지 않으므로 나라에서 국사를 가르치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게 된다. 오호라 지금의 한국은 이미 백은 죽었다고 할 수 있으나 소위 혼이라는 것은 남아 있는가, 아니면 이미 없어져 버렸는가?" 박은식은 아직 국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절대로 저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한국통사』를 마감했다. 당시 일본은 세계 언론에 한국이 문명화되고 있으며, 한국인이 일본의 통치를 고마워한다는 선전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외에 있는 한국인들 사이에 『한국통사』가 널리 읽혀지고, 중국인 등도 한국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일본의 선전이 거짓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국통사』는 당시 한국인들에게 민족정신으로 무장하고 망국의 아픔을 딛고 일어설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