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책 이야기
택리지(擇里志)

조선 최고 상인이 되고 싶은 자!

이 서책을 사시오!

부자 되는 비법이 이 안에 있소!

조선 최고 명당을 찾을 수 있는

비법서를 사시오!

뭐야! 내용이 똑같잖아!

제목만 다를뿐 같은 책이잖아!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팔도의 산물과 명당에 대한

내용이 모두 있단 말인가!

택리지

擇里志

인심좋고 후덕한 풍습이 있는

마을을 택하여 기록하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李重煥)

이중환은 명문집안 출신으로 1713년(숙종 39)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섰으며

1722년(경종 2)에는 병조좌랑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영조 즉위를 둘러싼 당파싸움에 연루되어

1726년(영조 2)에 유배를 가게 된다.

다음 해에 풀려났지만

사헌부의 탄핵으로 곧바로 다시 유배되었다.

유배가 끝난 후에도

그는 당쟁으로 인한 상처로

정치 참여를 포기하고

평생 전국 각지를 떠돌며 살았다.

죽기 6년 전인 1751년(영조 27)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닌

자신의 경험과 정보를 담은

한 권의 책 완성

택리지는 지리서이다?

택리지는 왜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을까?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산물들을 서술하여

장사에 활용한 『동국총화록』은

『택리지』 복거총론 생리편의 내용

"강화와 교동 두 섬은 ……

생선과 소금을 생산하는 마을이 되었는데,

한양과 개성 두 곳의 장사치가

여기에서 많은 이익을 취한다."

집(陽宅)과 묘지(陰宅)을 잡을 때 참고한

『조선팔도비밀지지』는

『택리지』 복거총론 지리편의 내용

"해와 달과 별빛이 항상 환하게 비치고,

바람과 비와 차고 더운 기후가

고르게 알맞은 곳이면

인재가 많이 나고 또 병도 적다."

전국 팔도를 유람하는 여행객에게

안내서 역할을 하는 『동국산수록』은

『택리지』 복거총론 산수편의 내용

"금강산 일 만 이 천봉은 순전히

돌 봉우리(石峯), 돌 구렁(石洞),

돌 내(川), 돌 폭포다. ……

이 산의 다른 이름은 개골(皆骨)인바,

이에 만길 산 꼭대기와 백길 못까지

온통 하나의 돌이니,

이것은 천하에 둘도 없는 것이다."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정치 논평서로 사용되었던

『택리지』 복거총론 인심편의 내용

"대개 사대부가 사는 곳은

인심이 고약하지 않은 곳이 없다.

당파를 만들어 죄 없는 자를 가두고,

권세를 부려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을

괴롭히기도 한다."

택리지에 대한 주변사람 및 후대의 평가

성호 이익(李翼)

"지금 우리 집안 사람 이중환이

한 권의 책을 편찬하였는데 ……

그 속에는 산맥, 수세, 풍토, 민속,

재화의 생산, 수륙의 운송을

조리있게 구분하여 기록하였으니,

이런 책은 본 적이 없다."

― 『성호전서』, 「택리지서」

다산 정약용(丁若鏞)

"이 책은 고(故) 이중환이 지은 것으로,

나라 안의 좋은 곳과 나쁜 곳을 논한 것이다."

― 『여유당전서』, 「발(跋)택리지」

육당 최남선(崔南善)

"우리나라 지리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精要] 인문지리학의 시초"

― 『택리지』(1912, 조선광문회)

택리지 = 지리서

택리지 = 실용서

택리지 = 정치평론서

택리지 = 종합인문지리서

이중환이

자신의 삶을 둘러싼 환경과 시대상을

두루 돌아보며

실학정신으로 서술한

당대 지식인의 현실인식과

시대의 고민이 담긴 책.

조선의 사회상을 생생히 반영한

당대 최고의 종합인문지리서

택리지(擇里志)

1. 책을 듣다.(택리지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

18세기 조선의 한 지식인이 쓴 책. 그 책이 정식으로 간행이 된 것은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후였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책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필사본 형태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었다. 그 중에는 18세기 경세의식을 가진 조선시대 유학자부터 조선의 문화를 정리하여 알리고자 했던 20세기 초 지식인이 있었다. 그 뿐 아니다. 해방 이후에는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했던 연구자들이 이 책을 통해 조선사회의 새 흐름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1.1. "경세적인 인식이 나타난 책" 18세기 이익과 정약용

조선시대 유학자 이익은 그 책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고려해야 하는 다양한 요소에 주목했다. 그 기준에 대한 식견을 높이 평가하면서 자손들이 볼 수 있도록 추천했다.

"지금 우리 집안사람 이중환이 한 권의 책을 편찬하였는데, (그 책에 담긴) 수천 마디의 말은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 속에는 산맥(山脈), 수세(水勢), 풍토(風土), 민속(民俗), 재화(財貨)의 생산, 수륙(水陸)의 운송을 조리 있게 구분하여 기록하였으니, 이런 책은 본 적이 없다. 나는 늙어 조만간 죽게 될 나이인지라 오소리가 언덕에 사는 것처럼, 쥐가 구멍에 사는 것처럼 포구(浦口)의 습한 땅을 벗어나지 못하니, 나도 모르게 내 자신을 돌아보며 탄식만 더할 뿐이다. 이러한 뜻을 책의 첫머리에 기록하여 어린 손자가 보도록 남긴다." (이익, 『성호전서』, 「택리지서」)

한편 정약용은 자신의 문집에 그 책에 대한 발문(跋文)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그는 이 책이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아다니는 내용이라고 설명하면서, 사대부의 살 만한 곳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남겼다.

"이 책은 고 이중환(李重煥)이 지은 것으로, 나라 안 사대부(士大夫) 장원(莊園)의 좋은 곳과 나쁜 곳을 논한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를 내가 논한다면, 먼저 물길과 나뭇길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마땅하다. 다음은 오곡(五穀)이고, 다음은 풍속(風俗)이며, 또 다음은 산천(山川) 경치가 좋아야 한다. 물길과 나뭇길이 멀면 인력(人力)이 매우 허비되고, 오곡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흉년을 자주 만나게 된다. 풍속이 문(文)을 숭상하면 말이 많고, 무(武)를 숭상하면 싸움이 많고, 이익을 숭상하면 백성이 간사스럽고 각박해지며, 힘만을 숭상하면 고루해서 난폭해지고, 산천이 흐릿하고 험악하면 빼어난 인물이 적고 마음이 맑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그 대체적인 것이다. …… 사대부(士大夫)가 땅을 점유하여 대대로 전하는 것은 마치 상고(上古) 시대 제후(諸侯)가 그 나라를 소유함과 같은 것이니, 만일 옮겨 다니며 남에게 붙여 살아서 크게 떨치지 못하면 이는 나라를 잃은 자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면서 초천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정약용, 『여유당전서』, 「발택리지」)

1.2. "조선의 대표적인 인문지리학 저서" 20세기 초 최남선과 정인보

이 책은 1912년 6월 15일 조선광문회에서 정식으로 간행되었다. 당시 판매가는 금 30전(錢)로, 책의 간행목적이 상업적인 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책을 발행한 조선광문회는 조선학에 대한 관심으로 표방하며 조선의 고전을 수립 정리하여 보존하고 전파하기 위해 1910년 최남선이 설립한 단체였다. 조선광문회는 책이 지닌 역사적인 의미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최남선이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지리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精要] 인문지리학의 시초"(최남선)

1931년 정인보는 조선고전을 소개하는 칼럼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고 있었다. 그는 이 책이 단순한 지리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사기』 등 중국의 역대 고전들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으며, 조선의 지리서로서도 김정호의 『대동지지』와는 달리, 철학적인 깊이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제 멀리 (중국의) 사마천 등과 비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선의 지리서로서 이 책보다 나은 책이 없음은 사실이니, 김정호의 『대동지지』의 자세함과 맞먹는데, 김정호의 저서는 수학적이요, 이중환의 저서는 철학적이다. 김정호의 저서는 정지(靜止)이며 구분(區分)이요, 이중환의 저서는 활현(活現)이요, 융관(融貫)이다." (정인보, 「조선고전해제14 : 이청담중환의 택리지」 ; 『동아일보』, 1931년 4월 6일자)

2. 책을 보다.(택리지의 소개)

100여 년이 넘도록 많은 학자들에게 위와 같은 평가를 받던 그 책은 바로 『택리지』이다. '택리'란 살 만한 곳을 가린다는 뜻으로 『논어』 「이인(里仁)」편에 그와 관련된 구절이 보인다.

"마을의 풍속이 인후해야 좋으니, 잘 가려서 인후한 마을에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子曰 里仁爲美 擇不處仁)." (『논어』 「이인(里仁)」)

인심이 좋은 마을을 가려서 그 인후한 풍속에서 산다는 의미이다. 살 만한 곳을 가린다는 점에서 '복거(卜居)'와도 의미가 통하는데, 복거가 풍수지리를 비롯한 한국의 자연관을 반영한다면, '택리'는 그보다 더 유학적이라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2.1. 택리지! 택리지?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는 이 책은 '택리지'라는 하나의 이름으로만 불리지 않았다. 현재 전해지는 필사본 중에는 '택리지' 외에 다양한 서명(書名)이 존재한다. 살 만한 곳을 찾는다는 의미의 '복거설(卜居說)', '팔역가거처(八域可居處)', '사대부가거처(士大夫可居處)' 등은 '택리지'라는 서명과 성격이 비슷한 편이다. 한편 지리지 성격을 드러내는 '팔역지(八域誌)'를 비롯해, 산수유람 성격의 '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과 '진유승람(震維勝覽)' 등의 서명도 있다. 전국 각지의 교역정보를 담은 '동국총화록(東國總貨錄)'를 비롯해, 풍수적 성격이 강한 '형가승람(形家勝覽)'과 '팔도비밀지지(八道秘密地誌)'라는 필사본까지 존재한다.

이처럼 다양한 서명은 책의 일부 내용을 부각시킨 것이지, 전체 내용을 포괄하는 내용은 아니다. 이것은 사람들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 책을 읽어내고,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일까?

2.2. 택리지 구성 (구성 및 세부 내용 소개)

『택리지』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다양한 서명을 가진 것처럼, 그 구성과 내용에서도 책마다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같은 서명이라 할지라도 다르게 구성된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택리지 내용을 전혀 가늠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1912년 조선광문회에서 간행한 『택리지』를 기초로 택리지의 대략적인 구성과 내용을 파악해 보면, 택리지의 본문은 크게 '사민총론(四民總論)', '팔도총론(八道總論)', '복거총론(卜居總論)', '총론(總論)'으로 구분된다.

서론에 해당하는 '사민총론'은 사대부, 농민, 공장, 상인(士農工商) 계층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사대부란 무엇인지를 다루었다. 그 다음에 나오는 '팔도총론'과 '복거총론'은 팔도의 위치와 연혁, 그리고 지역적 특징에 관한 내용이다. '팔도총론'에서는 먼저 조선의 연혁을 총론으로 다룬 뒤,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순으로 역사와 지리를 서술했다. '복거총론'은 사대부(사민총론)와 지역(팔도총론)을 설명한 뒤 이어지는 내용으로, 사대부가 살 만한 장소에 관한 것이다. 이중환은 거주할만한 곳을 정할 때에 지리(地理), 생리(生理), 인심(人心), 산수(山水)를 살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전국의 정보를 꼼꼼하게 살피면서 살 만한 곳을 정리했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다른 것이었다. '총론'에서 그는 다시 사대부의 이야기를 한다. 여기에는 당대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담겨있다. 그리고 사대부가 살 곳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내비쳤다.

3. 의도를 생각하다.(택리지의 내용 파악)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발문을 써서 『택리지』의 저술과 관련된 내용을 짧게 남겼다. 『택리지』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지리지의 내용(산천, 인물, 풍속 등)을 다루었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누군가가 알아봐줬으면 하는 바람을 말하였다.

"내가 황산강(黃山江)가에 있으면서 여름날에 아무 할 일이 없었다. 팔괘정(八卦亭)에 올라 더위를 식히면서 우연히 논술한 바가 있다. 이것은 조선의 산천, 인물, 풍속, 정치 교화의 연혁, 치란 득실의 잘하고 나쁜 것을 가지고 차례로 엮어 기록한 것이다. 옛 사람의 말에 "예악(禮樂)은 어찌 옥백(玉帛)과 종고(鐘鼓)만을 말한 것이랴"하는 것이 있다. 이 말은 예약의 진정한 뜻을 모르고 형식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을 한탄한 것이다. 이것은 살 만한 곳을 가리려 하지만 살 만한 곳이 없음을 한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넓게 보는 사람은 문자 밖에서 참뜻을 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중환, 『택리지』, 「발문」)

3.1 이 책은 단순한 지리서인가?

『택리지』는 백과사전식의 『동국여지승람』과는 다른 성격을 보여주는 조선시대 지리지로 평가받는다. 18세기 조선시대 학풍의 영향을 받았으며 지리에 대한 당시의 높은 관심이 반영된 책이라는 것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당시 동아시아 사회 속에서 조선은 중국과의 연계되어 있었다. 이중환은 그것을 곤륜산의 가지가 조선의 대종산인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설명했다.

"곤륜산의 한 가지가 대사막의 남쪽을 지나 동쪽에 이르러 의무려산이 되고, 이곳으로부터 크게 끊어지어 요동 평야가 된다. 평야를 건너 다시 일어나서 백두산이 되는데, 곧 산해경에서 말하는 불함산(不咸山)이 이것이다."

또한 전국을 행정구역 기준으로 구분하지도 않았다. 지역의 역사와 생활권을 함께 고려했으며, 역사적인 변천에 따라서 인구의 이동과 산업 활동의 쇠퇴를 함께 기술했다. 특히 사실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저자의 의견을 함께 드러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조선시대 자연관(지리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선산은) 임진란 때 명나라 군사가 이곳을 지나갈 때, 술사가 있어 외국에 재주 있는 사람이 많다고 시기하여, 병졸로 하여금 읍의 후맥을 끊어 불타는 숯으로 이곳을 지지고, 또 큰 쇠못을 박아 지운(地運)을 눌러버린 이후부터는 인재가 쇠잔하여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평안도 청천강 유역은) 기씨 고씨 조선의 전성 시대에는 땅이 좁고 백성이 많아 산을 열어 개간하였으나, 누차 청병(淸兵)에게 쫓기게 되어 땅이 많이 황폐하였다. 더욱 왕씨가 고려를 통일한 후로는 백성들이 삼남으로 옮겨가 지금은 들은 넓고 사람은 드물어, 겨우 산에서 밭갈고 있을 뿐이다. …… 그러므로 평안도의 쌀값은 항상 남도보다 비싸다"

"(14세의 때 강릉으로 갈 적에) 운교에서 대관령까지의 연도는 평지와 높은 재를 막론하고 모두 수목이 덮여 하늘을 볼 수 없었으며, 약 4일간의 노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보니 수십 년 전부터 산야가 모두 개간되어 농터가 되고 촌락이 서로 접하고 산에는 작은 나무도 남아있지 않다. …… 이는 성대의 인구가 점점 번성함을 볼 수 있고 산천은 황폐해 짐을 알 수 있다."

『택리지』는 지역사회를 풍수관점으로 바라보던 모습을 비롯해서,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현상을 연관시키고, 자신의 경험에 바탕으로 사회경제적인 변화상을 파악하던 조선시대 지식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중환은 인간과 자연, 지역, 입지 개념을 『택리지』라는 책 속에서 녹여내고 있었다. 하지만 『택리지』의 내용이 지리와 사람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저자 이중환이 말했던 '문자 밖의 참뜻'과 관련된다.

3.2. "온 하늘 아래에 한 번 사대부라는 명칭을 얻으면 갈 곳이 없다." (정치현실 비판)

사대부로서 살 만한 곳을 찾아다니던 이중환의 말이다. 살 곳을 찾겠다는 의도보다 사대부가 처해있던 당대 현실에 대한 한탄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당시 사대부의 현실이란 무엇일까? 이중환은 1728년 무신란(戊申亂)이 발생한 이후부터는 산림에 있는 사대부들까지 의심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조정에서는 당쟁에 휘말리고 당쟁을 피해 산림으로 나와도 의심받기는 마찬가지이다. 조정과 산림을 떠나 사대부들이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모두 글을 읽고 행실을 닦아 사대부가 된 것을 후회하고, 도리어 농·공·상의 신분을 부러워하게 된다'고 말했다.

"사대부가 사는 곳은 인심이 고약하지 않은 곳이 없다. 당파를 만들어 죄 없는 자를 거둬들이고, 권세를 부려 영세민을 침노하기도 한다. 자신의 행실을 단속하지 못하면서 남이 자기를 논의함을 미워하고, 한 지방의 패권 잡기를 좋아한다. 다른 당파와는 같은 고장에 함께 살지 못하며, 동리와 골목에서 서로 나무라고 헐뜯어서 뭐가 뭔지 측량할 수 없다."

18세기 조선 조정에 나타난 당쟁의 폐해는 심각했다. 영조는 당쟁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중환은 당파의 정치적 균형을 꾀하려 했던 이 정책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탕평체제 아래에서 사람들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영조가 전랑(銓郞)의 통청권(通淸權)을 폐지하여 '공의(公議)'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체제가 무너지게 되었다고 했다. 공의에 의한 정치는 사대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상이기도 했다. 이중환은 자신이 처해 있던 정치상황이 이상적인 방향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탕평정책으로 붕당의 폐해는 해결된 듯 보였지만, 상호간의 견제가 사라지게 되면서 부패가 나타나고 인심이 타락하는 현상으로 이어졌다고 본 것이다.

3.3. "재물은 하늘에서 내리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사회경제에 대한 재인식)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자를 보내는 데에 모두 재물이 소용된다. 그런데 재물은 하늘에서 내리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땅이 기름진 곳이 제일이고, 배와 수레와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꿀 수 있는 곳이 그 다음이다"

사대부로서 살 만한 장소를 찾으면서 이중환은 인심과 함께 생리(生利)를 선택 기준으로 삼았다. 생리는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활동과 관련된 것으로, 도덕적인 가치를 지닌 인심과 그 성격이 다르다. 그는 사대부도 경제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무절제한 이윤추구를 말한 것은 아니다. 사대부들의 경제활동에는 정도와 방법이 있었다. 이윤은 '도덕과 인의를 추구할 수 있는' 정도로 필요할 뿐이었다. 헐벗고 굶주리며 조상제사나 부모봉양을 하지 못하다면 도덕과 인의를 말해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한양과 개성, 평양 등지에서는 큰 장사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그러한 것들은 사대부로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배를 통해 이득을 얻어 관혼상제(冠婚喪祭) 사례(四禮)에 드는 비용에 보태는 것을 추천하기도 했다.

"어찌하여 생리를 논하는 것인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바람과 이슬을 음식 대신으로 삼지 못하고, 깃(羽)과 털(毛)로써 몸을 가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연히 입고 먹는 일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다. 위로는 조상과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처자와 노비를 길러야 하니, 재리(財利)를 경영하여 넓히지 않을 수가 없다. 공자(孔子)도 넉넉하게 된 다음에 가르친다 하였다. 옷을 헐벗고 밥을 빌어먹게 되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지 못하고, 부모를 봉양하지도 못하며, 처자의 윤리도 모르는 자에게 어찌 가만히 앉아서 도덕과 인의를 말하라 하겠는가. 무릇 세상 사람들이 빈[空] 명망에는 민감하면서, 실용은 버린 지 오래 되었다. 늘 하기 어려운 일을 억지로 하기 때문에, 남몰래 악한 짓을 하면서 겉으로는 착한 체하는 자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먼저 의식의 근원에 힘쓴 다음, 예의의 단서(端緖)를 닦게 하여, 사람에게 악한 일을 숨기지 않고 나타내도록 하는 것이다."

경제활동에 관한 주장은 당시 변화하는 사회를 직시하던 그의 안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중환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농업생산력과 유통경제에 관심을 가졌다. 도별로 토지의 비옥도와 생산현황을 파악하고, 상업적 농업관련 내용도 다루었다. 농업분야 뿐 아니라 상업과 유통문제도 중요한 경제활동으로 인식했는데, 무엇보다 물자의 유통경로와 집산지에 주목했다. 이중환은 자신이 처한 경제현실을 통찰하고 나름의 경제론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것은 개인의 이익 추구라기보다는 국가의 경영[경세(經世)]과 더 밀접해 보인다. 1960~70년대 역사학자들은 그러한 경향을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이해했다.

4. 의미를 이해하다.(택리지의 역사적 의의)

"원본 없이 100년 넘게 다양한 버전으로 전해지던 책."

"지리지 요소와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지리지로만 평가할 수 없는 책."

바로 『택리지』이다. 저자 이중환은 사대부로서 살 만한 곳을 찾기 위해 책을 썼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과연 이중환은 어떤 인물이기에, 그런 책을 썼던 것일까?

4.1. 저자 이중환. 그는 누구인가?

"(이중환은)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 살 집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말년에 노농(老農), 농포(農圃)가 되기를 원하였으나 그것마저 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택리지』를 쓰게 된 것이며, 서쪽도 마땅치 않고, 북쪽도 마땅치 않으며, 동쪽과 남쪽에도 알맞은 곳이 없다 하여, 아무데도 살 만한 곳이 없다는 탄식을 하였다. 그런즉 인심(人心)이 험한 것과 세상이 박절한 것은 여기에서도 볼 수 있으니 그의 뜻이 너무 슬프게 느껴진다." (목회경, 『택리지』, 「발문」)

이중환은 예조참판을 지낸 이진휴의 아들로, 1690년에 태어나 1713년 2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명문집안에서 문과합격까지, 그의 앞날은 밝아보였다. 하지만 숙종이 죽은 후 경종과 영조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정치파장을 피해갈 수 없었다. 영조의 왕위승계에 위협을 가했던 목호룡의 고변에 연루되어 1725년대부터는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1752년 죽을 때까지 그는 정계에 나아가지 못한 채, 목회경의 말처럼 떠돌아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 『택리지』는 이중환이 평안도와 전라도를 제외한 전국을 직접 돌아보고서 저술한 책으로, 그가 죽기 전 1751년 4월에 완성했다.

4.2.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을 써준 사람들 (남인, 근기남인)

『택리지』는 「서문」이나 「발문」 등을 남긴 사람들을 통해서도 그 성격과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현존하는 『택리지』에서 「서문」이나 「발문」 을 남긴 사람들은 이익(1681~1763), 이봉환(?~1770), 목성관(1691~?), 목회경(1698~?), 정약용(1762~1836)이다. 이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무엇이 있을까? 바로 남인계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18세기 이익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학자들은 조선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들을 '실학파', 다시 이를 세분해서 '경세치용학파'나 '중농학파'로 분류하기도 했다. 『택리지』의 「서문」과 「발문」을 썼던 이익과 정약용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의리지학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현실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당시 사회가 직면하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와 함께 경학과 문학을 비롯해 지리학과 서학 및 수학 등 학문의 관심분야가 국학 전반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4.3. 당대 지식인의 현실인식과 고민이 담겨 있는 책

조선시대 실학자라 불리는 일군의 학자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해 있던 현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꿈꾸던 이상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현실비판은 현실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그들은 나름의 방식대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적극적으로 고민했다. 그리고 이는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의 모습이기도 했다.

이중환은 유배생활 이후 다시 정계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현실문제에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사대부로서 살 만한 곳을 찾아 헤맨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판단하기에 『택리지』의 지역정보는 지나치게 자세할 뿐 아니라 '경세(經世)'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살았던 현실의 문제를 오랜 세월에 걸쳐 심각하게 사색하여 온 결과의 소산이라는 의미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