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책 이야기
매천야록(梅泉野錄)

1910년 8월 29일 조선총독부 관보

한국이 일본에 강제 병탄되다.

지리산 자락의 외진 시골에서

나라가 망하는 상황을 지켜 본 어느 선비는

죽음을 결심하고 유언을 남겼다.

吾無可死之義 / 나는 반드시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但國家養士五百年 / 다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인데

亡國之日 / 나라 멸망하는 날

無一人死難者 / 한 사람도 국난에 죽는 이가 없다면

寧不痛哉 / 어찌 통탄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자식들에게 남긴 유서」

망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떳떳한 죽음을 택한 조선의 지식인

매천 황현(1855~1910)

그가 남긴 시대의 기록

매천야록

매천(梅泉) 황현(黃玹)

명문가 후손도

유명한 스승을 둔 적도

관리를 지낸 경험도 없는 선비

그러나 당대의 대유학자

기정진(奇正鎭)이 인정한

시문(詩文)의 천재

그는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대한제국 시기 3대 문장가로 불렸다.

매천집을 발간한 김택영이 바라본 황현

"(그는) 바르고 강직해 악한 사람을

원수처럼 미워했다."

"옛 글을 읽다가

충신·지사가 어려움을 겪으면

눈물을 줄줄 흘렸다."

『매천집』 「본전」

조선의 개항(1879년)

운요호(雲楊號) 사건과 강화도 조약

청일전쟁(1894년)

청과 일본의 각축장이 된 한반도

을미사변(1895년)

일제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

을사늑약(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

의병운동

일제의 침탈에 항거

황현은

그가 보고 들은

당대의 격변의 역사를

생생히 기록하여

한 권의 책으로 남겼다.

梅泉 매천 황현의 호

野錄 야록 재야 선비의 개인적 기록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기록하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명성황후를 염(殮)하는 광경

“(이 이야기는 정만조로부터 들었는데, 그가)

궁내부 관리로 그 일에 참여하여

직접 눈으로 보았던 것이다.”

1905년 의병장 최익현 체포 상황

“구례의 상인 강모(姜某)가……

그의 집을 방문했다가

구속될 때의 상황을 목격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에게 말해준 것이다.”

1907년 이완용 내각에 대한 기록

“이완용은 아들 항구와 조카 명구를

시종에…… 앉혔다.

시종 박성빈 등 47인은 모두

그와 가까운 문객이었다.

사람들은 이에 가족정부라고 불렀다.”

생생하고 촘촘하게 기록하다

청일전쟁에 대하여

청국과 일본 사이에 오고간

공문 내용을 토대로

1894년 청일전쟁의 경과를

시기별로 자세히 기술

이후 일제의 무력침탈과정도

생생하게 소개

1905년 을사늑약에 대하여

이토 히로부미의 무력을 동원한 협박

대신들의 우유부단한 태도

‘을사오적’의 일제 협력 등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

지배층을 가차 없이 비판하다

고종에 대하여

고종을 비판한 안종덕의 상소를

인용하며

(안종덕은)“임금이 청렴하지도, 근면하지도,

공정하지도, 미덥지도 못한

과오를 공격하였다.”

명성황후에 대하여

“기민하고 권모술수가 많았는데,

정치 관여 20년에

점차 망국에 이르게 했다.”

흥선대원군에 대하여

“사치와 교만에 빠져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었던 것이

장동(壯洞) 김씨에 비교하여

오히려 더한 것이었다.”

의병운동에 대해 풍부하게 기록하다

의병운동에 대하여

1908년 1월부터 1910년 6월까지

매월 전국 의병의 활약상을

자세하게 정리

주요 의병장의 활약상과

체포·투옥·순국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

일제의 호남의병 탄압

“왜군이 길을 나누어 호남의병을 수색하였다.

사방에서 둘러싸 그물 치듯 펼치고 순사를 파견하여

집집마다 빗질하듯 뒤져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곧 살육을 저질렀다.”

황현

“책을 절대 외부에 알리지 말라”

고 유언

후손들이 부본 몇 부를 제작하였지만

극비에 붙여 세상에 알려지지 않음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그 사료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간행함으로써

세상에 공개된 『매천야록』

순국을 선택한

유교 지식인이 남긴

개항 전후 조선과 대한제국 백서

매천야록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물과 뫼도 찡그리니,

무궁화 우리 강산 망하고 말았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먼 옛일 생각하니,

인간세상 식자(識者) 노릇 이리도 어렵구나."

박은식이 『한국통사』(1915)에 소개한 시(詩)의 한 구절이다. 그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순간을 어느 지식인의 자결과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절명시(絶命詩)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 시의 지은이는 다름 아닌 황현(黃玹, 1855~1910)이었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물과 뫼도 찡그렸다'고 하여 나라 잃은 아픔을 조국 산하 전체에 투영했고, 국가적 배양을 받은 유교 지식인으로 망국을 막지 못한 자신도 뼈아프게 자책했다. 그런데 황현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역사가 김택영은 『한사경(韓史綮)』(1918)의 서문에서 당대사 관련 역사서로는 유일하게 황현의 『매천야록』을 포함시켰다. 그가 죽기 전에 집필에 몰두했을 『매천야록』이란 어떤 책일까?

황현은 망국의 소식을 들은 뒤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지만, 망국의 암운이 드리운 역사적 배경을 분석해 후대인에게 증언하고자 했다. 보고들은 것을 철저히 기록했고, 모르는 부분은 당대에 수집할 수 있는 자료와 인맥을 동원해 추적했다. 기록의 출처도 밝혀두었다. 그가 남긴 역사기록은 매우 생생하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가 우리의 손에 의해 제대로 쓰이기 힘들었던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한국근대사를 복원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사의 보고(寶庫)'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황현은 누구?

이 책의 저자 황현은 자가 운경(雲卿), 호가 매천(梅泉)이다. 전남 광양에서 태어나 구례에서 성장해 생을 마친 유교 지식인이다. 가문은 한미했지만 할아버지가 상업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까닭에, 1천여 권의 장서를 마련해 독서에 전념할 수 있었다. 20대부터 서울에 체류하며 과거 준비에 몰두하여, 1888년 생원시에 1등으로 입격하게 된다. 그러나 '미친 나라의 미친 사람들'이 판치는 서울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신기선 등 고관들의 관직 제안도 거절한 채 구례로 돌아가 집필활동에 남은 생애를 바쳤다. 한때 중국 망명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좌절되자 암울한 시간을 보냈고, 1910년 국권상실 소식에 절명시 4수와 아들에게 전하는 유언을 남긴 채 다량의 아편을 음독하고 생을 마감했다. 저서로는 문집인 『매천집』과 함께 『매천시집』, 『오하기문(梧下記聞)』, 『동비기략(東匪紀略)』 등이 있다.

그는 매우 강직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악한 것을 원수같이 미워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면박을 주어 세도가(勢道家)에게 호감을 주지 못했다. 오죽하면 "매천의 붓 아래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했을까. 유교 지식인임에도 진부한 학문을 싫어하여 문장에 몰두했다. 특히 시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 이건창, 김택영과 더불어 한말 3대 시인의 한 명으로 꼽힌다. 군사‧법률‧재정‧역사에 관심을 가졌고 서양의 이용후생에도 흥미를 보였다. 그는 명문가의 후손도 아니고, 관리를 지낸 경험도, 유명한 스승을 둔 적도 없었지만 당대 지식인사회에서는 매력적인 인물로 통하였다. 명사들과의 교류가 끊이지 않은 이유이다.

시대적 배경

황현이 세상에 눈을 뜬 20,30대(1870,80년대 중반)의 조선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 시기였다. 1863년 세도정치의 마지막을 장식한 철종이 사망하고, 권력기반을 전혀 달리하는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조선에는 개혁의 기운이 감돌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기대가 고개를 들었다. 왕권 복원의 노력과 서원 철폐의 시행은 강제성이 수반되었지만 희망의 문을 여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기대는 곧 우려로 바뀌었다. 1876년 일본에 의한 강제 개항을 시작으로 제국 열강의 조선 침탈이 본격화되었다. 고종은 위기의 시대에 개혁의 주체로 나서지 못했다. 민생을 책임질 관리들은 오히려 폭력과 수탈로 백성들을 괴롭혔고 외세와 결탁해 망국을 재촉했다. 정부 정책은 이미 일관성과 지속성을 상실했다. 결국 흥선대원군과 고종도 탐욕스런 권력자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물론 암울한 현실을 바꾸려는 의욕적인 시도도 있었다. 특히 대한제국기 초기에는 정부 중심의 '광무개혁'과 『독립신문』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시도되었다. 뿐만 아니라 언론 창간과 학회 설립을 통한 인민 계몽, 신구참작의 정신을 반영한 신식학교의 설립, 민족자본의 축적을 목표로 한 회사와 공장의 설립이 이어졌다. 유교 지식인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나 일본에 무력적으로 저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망국의 흐름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매천야록』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대한제국은 왜, 누구에 의해 멸망으로 치달았는가!

책의 구성

『매천야록』은 황현이 지은 야사(野史 : 정부가 편찬하는 공식 역사기록인 정사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시기상 고종 원년인 1864년(고종이 철종에 이어 왕위에 즉위한 해는 1863년 12월이다)부터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까지 총 46년의 역사를 7책 6권에 담았다. 국정의 문란과 외세의 침탈이 정점에 달한 해인 1894년 이후의 내용이 단연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황현이 상경한 해인 1883년의 전후 10년, 즉 1864~1893년의 내용은 책 전체로 볼 때 서론에 해당한다. 주로 남에게서 들은 얘기를 요약한 것이다. 마지막에 황현의 죽음에 관한 언급이 보이는데, 이는 후대의 가필(加筆)이다. 1910년 8월 22일 '합방조칙'이 내려진 이후부터 9월 10일 황현이 자결할 때까지에 관한 내용은 제자 고용주(高墉柱)가 추가한 것이다.

황현의 눈 1 : 자료의 출처를 정확히 밝혀라

이 책을 읽다 보면 자료를 다루는 기술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몇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우선 자료의 출처와 사건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히려고 했다. 제도 개편이나 관리 임명, 정치 사건에 관한 내용은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파악했지만, 이것만으로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은 관련자와의 대화, 현지 방문 등을 통해 비하인드 스토리에까지 접근했다. 출처도 밝혀놓았다. 이렇게 출처를 밝혀두면 발언의 주체가 누구이고, 그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지 판단하기가 쉽다. 그 실례들을 살펴보자.

"(1895년 명성왕후를 염하는 광경에 관한 이야기는 정만조로부터 들었는데) 궁내부 관리로 그 일에 참여하여 직접 눈으로 보았던 것이다."

"(1905년 의병장 최익현의 체포상황에 관한 이야기는) 구례의 상인 강모(姜某)가 … 그의 집을 방문했다가 구속될 때의 상황을 목격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에게 말해준 것이다."

황현의 눈 2 : 역사의 생생한 이면을 보라

이 책에는 『조선왕조실록』 등 정부가 편찬한 역사서에서 나타나는 '역사엄숙주의'가 보이지 않는다. 황현은 정사와 야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건의 요점뿐만 아니라 사건의 전말까지 친절하게 보여준다. 사건 정황을 설명할 때 문자화된 자료뿐만 아니라 소문과 유언비어 등 구술자료도 적극 활용했다. 당시 상황을 생생하고 풍부하게 전달하는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다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사건현장으로 돌아간 듯 한 착각에 빠진다. 이런 서술방식은 고종의 무능과 고위 관리의 전횡을 묘사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예를 들어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을 통해 일본이 조선에 우월적 지위를 획득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청일 양국 간에 오고간 공문의 내용을 보여줌과 동시에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 조선의 행정력을 마비시키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과 관련해선, 이토 히로부미의 고종과 대신에 대한 협박, 고종의 의사 표명 회피, 한규설을 제외한 나머지 대신들의 굴복, 일본의 '을사오적'에 대한 물질적 보상 등 일련의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황현의 눈 3 : 흑백논리를 넘어서

황현은 대한제국을 멸망에 빠뜨린 역사의 죄인들을 필봉(筆鋒)으로 단죄하면서도 흑백논리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 시대와 인물을 평가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은 긍정 또는 부정의 이분법적 태도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그런 잣대로 평가하기 힘든 부분이 더 많다. 황현은 국정의 파탄과 외세의 침탈을 초래한 인물들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공(功)과 과(過)를 철저히 구분해 평가했다.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 선의의 피해를 입은 자에 대해 위로의 말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원 철폐가 무고한 유림에게까지 큰 피해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서원 철폐의 일이 운현(雲峴 : 흥선대원군의 자택)에게서 나왔다고 해서 싸잡아 그르다고 해선 안 된다."

"그(어윤중)는 성품이 강직하여 남이 원망을 하더라도 목적을 과감하게 달성하였으므로 과오도 많았지만 공무에 열중하여 시속배들은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자료적 가치 1 : 연표(年表)로 보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

『매천야록』은 몇 가지 측면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우선 역사연표로서 활용도가 높다. 이 책은 1864년 고종의 공식 왕위 등극과 흥선대원군의 집정부터 1910년 국권을 상실할 때까지 조선과 대한제국의 굵직한 사건들을 연도별, 월별로 소개했다. 마치 16년간의 '헤드라인 뉴스'를 단번에 읽어내려 가는 듯하다. 따라서 1864~1910년 몇 월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파악하려면 해당 시기를 펴면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특기할 만한 사건에 대해서는 상세한 설명도 곁들였다.

이 책에 수록된 내용들을 살펴보면, 정치문제는 국왕 등극, 정변, 조칙, 내각 개편, 관청·관제·행정구역 개편, 민란, 반정부운동, 반일운동, 정치인 체포‧투옥‧사형‧자결, 정치인 비리 등을, 경제문제는 재정 운영, 화폐 제도, 세제 개정, 지방관 연봉, 광산 운영, 차관 도입 등을, 군사문제는 국제전쟁, 군대 정원과 운영, 군대 해산, 외국군 주둔‧철군 등을, 사회문제는 단체 설립, 이민, 철도 개통, 신문 창간, 친일단체 운영 등을, 문화·교육문제는 국가의례 시행, 관립학교 설립, 신문 창간, 학회 설립, 종교단체 창립, 민속 등을, 외교문제는 주한외교관 교체, 국제조약 체결 등을, 기타는 전염병, 국내외 자연재해 및 피해상황, 공사 등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자료적 가치 2 : 재야 지식인이 남긴 '대한제국 멸망 백서'

황현의 고뇌는 사실 이 책이 망국을 앞두고 남긴 '대한제국 멸망 백서'였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황현은 역사연표를 만들되 과연 '망국의 상황을 미리 막을 수 없었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바탕에 깔고 매년의 역사를 정리했다. 그리고 망국의 주요 원인이 정치적으로는 국왕의 무능, 왕실·척족세력의 횡포, 관리의 부정부패에, 경제적으로는 무원칙한 경제정책, 사회적으로 신분제도의 붕괴, 신분 갈등, 민란 발생에, 대외적으로 일본의 정치·경제·문화적 침탈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비판에는 성역이 없었다. 황현은 전통적인 역사서의 최대 금기사항이었던 국왕에 대한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당파와 정파의 이해에도 자유롭다 보니 관리와 학자에 대한 비판에서도 예리했다. 동시대의 역사서인 어윤중의 『종정연표』, 정교의 『대한계년사』, 김윤식의 『(속)음청사』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첫째, 황현은 무능한 국왕과 부정부패한 관리를 망국의 주인공으로 지목했다. 이 책에는 유생들의 상소(上疏)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자주, 또 길게 실려 있다. 이는 당대 지식인의 입을 통해 고종의 실정(失政)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정확히 짚어주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04년 부분에는 안종덕의 상소를 소개했다. 상소에서 안종덕은 고종이 '청렴‧근면‧공평‧신뢰로써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글을 내려 관청에 현판으로 걸게 했는데 고종은 이를 논할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부정부패의 정점에 있는 고종이 관리들에게 청렴과 공평무사한 행정을 권장할 자격이 있느냐는 황현의 시각을 대변하는 셈이다. 명성왕후에 대해선 "기민하고 권모술수가 많았는데, 정치 관여 20년에 점차 망국에 이르게 했다."고 평가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한 항목에서 이런 언급을 남긴 것을 보면, 황현의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흥선대원군에 대한 평가는 어떠했을까? 1860년대 경복궁 중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과 진사시험 합격자를 남발하고, 포도대장 이경하(李景夏)가 사람을 쉽게 죽이는 것을 묵인하는 등 집정 10년간 국정을 농단한 사례를 차례대로 열거한 뒤 1873년 실각의 상황을 설명한 부분에선 "얻는 것이 불꽃같으면 잃는 것도 순식간에 식는 법"이라고 조소하였다. 비판의 핵심은 사실 조롱에 있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이 집정한 10년이 조선 말기에 국정을 쇄신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데, 그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버렸다는 아쉬움이 짙게 깔려 있다.

"(고종이 등극한지) 10년 동안은 국가가 무사했으니 정히 천 년에 두 번 다시없는 기회로 크게 일을 할 수 있는 때였다. … 인재들이 배출되고 백성을 잘 살게 하고 불어나게 하며 가르치기를 10년간 했다면 천하에 또한 못할 일이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운현(雲峴)이라는 사람은 … 사치와 교만에 빠져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었던 것이 장동(壯洞) 김씨(金氏)에 비교에 오히려 더한 것이었다. … 천년 후에 또한 반드시 이 일에 탄식하고 통한할 자가 있을 것이다."

부정부패한 관리를 비판할 때에는 좀 더 구체적인 사례와 수치를 제시했다. 황현의 치밀한 분석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에서는 관리가 되기 위해 제공한 뇌물의 양과 관리에 임명된 후 공금을 횡령한 금액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1892년 이용직은 100만 냥을 바쳐 경상감사가 되었고, 1894년 전 통제사 민형식은 72만 1천 냥의 공금을 횡령했다. 탁지부가 1894~1905년 간 이루어진 공금횡령사건을 조사한 결과, 관찰사‧군수‧어사로 3,000냥 이상의 공금을 횡령한 자가 7,000여 명이었다고 발표한 내용을 서술한 부분에 이르면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외세와 결탁해 망국을 재촉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음을 보자.

"평양 백성들이 군수 팽한주가 130만 냥을 착복했다고 호소하여 곧 파면될 처지였다. 그런데 일본공사 임권조가 (러일전쟁에서) 자기들 군대가 평안도로 들어갈 때 팽한주의 공로가 있었다 하여 파면하지 말도록 청했다. 또 관찰사 윤헌은 교섭을 잘하여 비록 영남관찰부에서 그의 부정을 조사했으나, 끝까지 따지지 말도록 했다. 소인배들의 외세에 빌붙은 모양이 이와 같았다."

둘째, 일본의 한국 침탈 및 강제병합 과정과 한국인의 피해상황을 구체적인 근거로 제시했다. 불평등한 조약의 체결, 이권 침탈, 정치·사회단체의 해체는 물론이고, 1907년 충북 군민 600명을 돈으로 유인하여 멕시코에 팔아넘긴 일, '폭도 토벌'을 구실로 여주·지평·양근·원주 일대에서 3,000명을 살상한 일 등 다양한 사례가 소개되었다. 서울의 민호(民戶) 4만 호 중 집주인이 문건 가지고 있는 것은 2천 호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외국인에게 전당으로 잡혔다는 언급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백성들에게 가한 폭력과 폐해가 상상 이상이었음을 실감케 한다.

이밖에도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무기 강탈, 1894년 이래 한국에서 사망한 일본인에 대한 일본의 보상금(187,400원) 요구와 정부의 제공, 1905년 불필요한 1,000만원 차관 도입, 을사늑약 직후 참정 한규설 강제 해임, 1906년 일본의 경남 진해와 함남 영흥 항구 강탈 및 군항 설치, 1906년 일본인 고문‧차관‧지방관 임명, 1907년 일본군의 동래‧함흥 무기고 약탈, 일본군의 청풍‧진천‧상주‧제천 관아 방화, 1909년 일본 군함 30만원 구입 후 1/7 가격 재판매 등 국권침탈과정이 소상하게 제시된다.

일본의 침략은 정치·경제·군사적인 면에 그치지 않고 문화적 침탈로 이어졌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등 국제전쟁으로 각종 문화유산이 파손되었고,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한국의 문화재는 마치 '전리품'처럼 불법 반출되었다. 이 책에 언급된 것만 해도,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강점 후 궁궐의 보화·제기(祭器) 등의 반출, 1905년 러일전쟁 시 평양 함구문 훼손, 1906년 일본 특사의 경천사탑 반출, 1907년 용산에 청루(靑樓) 설치 시 민간 묘 800여 훼손, 일본군의 의병 추적 중 이황의 사당과 고택 방화, 1908년 정족산성에 보관된 사초의 절도, 1909년 이토의 내규장각 도서 반출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셋째, 무능한 국왕, 부정부패한 관리, 외세의 국권침탈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자존감을 잃지 않고 맹렬하게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음을 보여주었다. 1904년 전국적인 황무지 개척권 이양 반대운동으로 인해 일본이 일시적으로 굴복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이어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도 불구하고 상소운동, 대일민간 외교교섭, 순절투쟁, 의병운동, 의열투쟁, 계몽운동 등 반일운동이 폭발적으로 전개되었음을 상세히 서술했다.

황현이 반일운동에 관한 기술에서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의병운동과 순절투쟁이었다. 최익현의 의병활동과 관련해선 을사오적 처단 요청 상소, 태인의병 봉기 이후 체포·유폐·순국, 장례와 문집 간행에 이르는 전 과정을 시리즈로 소개했다. 순국에 관한 평가에서도 "개국 이래 죽은 이에 대한 애도가 이처럼 대단한 적이 없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순절투쟁의 사례를 언급한 부분도 적지 않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민영환의 자결은 물론이고, 유학자 송병선, 학부 주사 이상철, 시위대 대대장 박성환, 교원 정재홍, 일본 유학생 원주신 등으로부터 이름 모를 인력거꾼, 계집종 등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절투쟁이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폭넓게 전개된 저항방식이었음을 보여준다.

국외에서 민족운동가들의 펼친 활약상도 주목했다. 1907년 이상설이 헤이그특사 활동 이후 미국·프랑스·영국을 순회하며 외교활동을 벌인 사실, 미주의 『대동공보』, 러시아의 『해조신문』 등 교포들의 신문 창간, 1908년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슨 처단활동과 재판과정, 러시아 연추(煙秋)에서 이범윤 의병부대의 활약, 1909년 미주 국민회의 설립, 안중근의 이토 처단·체포·재판·순국, 일본 유학생의 강제병합 반대 연설회 참석 등을 소개했다.

자료적 가치 3 : 놓쳐서는 안 될 의병의 역사

『매천야록』의 가치는 대한제국의 의병운동에 관한 당대의 기록으로는 단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뒤바보[桂奉瑀]의 『의병전(義兵傳)』(1920)에 앞서 선구적인 업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황현의 의병에 대한 관심은 각별하다. 1908년 1월~1910년 6월에 관한 기술에서는 월별로 '의병 소식'[義報] 항목을 별도로 두어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의병의 활약상을 소개했다. 이렇게 기술된 내용만 모아도 '대한제국 의병운동사'를 구성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의 범위와 사건에 대한 심층 분석이 풍부하다. 이는 황현이 의병운동을 반일운동의 정수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1895~1896년 진행된 전기 의병에 대해선, '역적 토벌'을 기치로 내건 문석봉부터 명성왕후 시해에 반발해 봉기한 김복한, 이설, 기우만 등에 이르기까지 간략히 언급했다. 명예를 쫓는 '미친 도적떼'가 많았다고 비판한 점은 곱씹어 볼 부분이다. 의병운동에 관한 기술에선, 역시 1905~6년의 중기 의병, 1907년 이후의 후기 의병에 관한 내용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1906년 홍주의병과 태인의병의 경과, 최익현의 체포‧순국‧문집간행은 매우 구체적이다. 이밖에도 김복한, 고광순, 이석용, 허위, 민긍호, 이강년, 유인석, 민긍호, 이은찬, 심남일, 전해산, 정용대, 이범윤 등 주요 의병장의 활약상과 체포‧투옥(사형) 과정을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다. 일본측 기록인 『폭도에 관한 편책』에 의병 탄압 주체의 일방적인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면, 『매천야록』은 반일운동의 주체이자 피해자인 의병의 시각을 반영한 귀중한 자료이다. 호남 의병장인 백낙구의 장렬한 최후 순간을 언급한 부분을 보자.

"(1907년) 호남 의병장 백낙구가 왜군들과 태인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 왜군이 태인 들판을 습격하여,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전세가 이롭지 못한 것을 보고 그를 부축하여 도망가려고 했다. 백낙구는 탄식하며 '너희들은 가고 싶은 대로 가라. 여기는 내가 죽을 곳이다' 하고 몸을 꼿꼿이 세우고 '백낙구가 여기 있다' 하고 소리쳤다. 그는 마침내 탄환을 맞고 절명했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등 한반도 주변 열강을 상대로 한 전쟁과 을사늑약 등 대한제국에 대한 무력 행사를 통해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였다. 이때 강제병합의 마지막 걸림돌은 일본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이던 의병세력이었다. 특히 호남의병은 1909년 상반기에 전국 의병 전투 횟수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일본 군경을 괴롭혔다. 일본은 지리산 일대를 무대로 격렬히 저항하던 호남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1909년 9~10월 보병 2개 연대와 해당 지역 경찰·헌병, 그리고 수뢰정을 동원해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벌였다. 일명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었다. 일본의 무자비한 진압과 호남의병의 최후 항전 모습은 당대 기록으로는 유일하게 『매천야록』에 실려 있다.

"왜군이 길을 나누어 호남의병을 수색하였다. 위로는 진산, 금산, 김제, 만경, 동으로는 진주, 하동, 남으로는 목포로부터 사방에서 둘러싸서 그물 치듯 펼치고 순사를 파견하여, 촌락을 수색하는데, 집집마다 빗질하듯 뒤져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곧 살육을 저질렀다. … 의병들은 삼삼오오 목숨을 구해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숨을 곳이 없었다. 강자는 앞으로 돌진하여 싸우다 죽었으며, 약자는 땅을 기다가 칼을 맞았다. 점차로 쫓겨서 강진, 해남 등 육지가 끝나는 곳에 이르러 죽은 자가 무려 수천 명이었다."

자료적 가치 4 : 소문·전언·일화에 담긴 당시 백성들의 목소리

『매천야록』에는 문자화되지 못한 많은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저자 황현이 담은 백성들의 목소리였다. 시대 상황과 여론의 흐름을 보여주기 위해 이보다 효과적인 수단이 없었다. 특히 을사늑약 체결 이후 친일파에 대한 분노와 반일운동의 주역에 대한 존경 어린 묘사가 그러하다. 극적인 부분에서도 감정의 폭발을 억제하고, 풍자와 해학 그리고 긴장미까지 곁들여 본인이 지닌 문학적 재능을 충분히 발휘했다. 그 사례를 보자.

"(1906년 의병장 최익현이 체포되자) 주점의 기생과 길을 다니던 거지들은 목이 쉬도록 탄식했고 백정과 무당들도 그의 교자를 바라보고 절을 하며 하늘을 향해 우리 최 충신(崔忠臣 : 의병장 최익현)을 살려달라고 외쳤다."

"(1906년 을사오적의 한 명인 이지용에게 첩의 제안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한 전주기생 산홍에 대해 어떤 이가 시를 쓰기를) '온 세상 모두 다투어 나라 팔아먹은 놈을 좇아, 비굴하게 웃으며 굽신거리느라 날마다 바쁘구나. 그대들 금옥이 지붕보다 높더라도, 산홍의 일점 단심(丹心)은 사기 어려우리.'라고 하였다."

한국에서 '아리랑'이란 표현이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이 바로 『매천야록』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1894년 창덕궁을 보수할 때 '아리랑타령'을 부르며 공사를 독려했다는 기록이 바로 『매천야록』에 보인다. '아리랑'이란 음가가 언제부터 정착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대개 1894년 『우편보지신문(郵便報知新聞)』에 실린 '아라랑', 1896년 『THE KOREAN REPOSITORY』의 「Korean Vocal Music」에 실린 '아르랑', 1908년 『대한매일신보』의 '알으랑', 1914년 『조선속곡집 상』의 '아르렁' 등을 거쳐 1926년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에 이르러 오늘날과 같은 '아리랑'으로 정착되었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런데 『매천야록』을 통해 이미 1894년 이전부터 '아리랑'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해당 부분을 살펴보자.

"(1894년) 1월에 고종이 낮잠을 자다가 광화문이 무너지는 꿈을 꾸었다. 고종은 너무나 놀라 잠에서 깨어났으나 매우 좋지 않은 꿈이었다. 이해 2월에 창덕궁으로 자리를 옮겨 즉시 동궁(東宮 : 동궐, 즉 창덕궁)을 고쳤다. 이때 남도(南道)에서는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 계엄이 급박했지만 토목공사는 더욱 열을 올렸다. 고종은 밤만 되면 전등을 켜 놓고 광대들을 불러 새로운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이번 곡은 '아리랑타령(阿里娘打令)'이라고 했다. … 원임대신 민영주는 그 광대들을 거느리고 오직 아리랑타령만 전담하고 있으면서 그 우열을 논하여, 상방(尙方)의 금은으로 상을 주었다."

한계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개항과 '보호'를 빌미로 국권을 침탈한 일본의 의롭지 못한 행위를 고발하고, 개인의 이익에 눈에 어두워 인민의 고혈을 갈취한 왕실·척족과 관리 그리고 외세에 결탁하여 국권을 실추시킨 친일파의 죄상을 낱낱이 폭로하여, 역사의 심판대 앞에 서게 하고자 하였다.

황현의 시도는 여러 가지 성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한계를 지닌다. 첫째, 당파적 입장을 완전히 배제되지는 못했다. 이시원·이건창 등 소론의 핵심인물에 대한 칭찬 일색의 비평을 내놓은 점을 보면 인물 평가에 당파적 호불호(好不好)가 완전히 배제되지는 못했음을 보여준다. 둘째, 근대전환기 인민의 역량 성장을 소홀히 평가했다. 조선이 백성들이 동학농민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역량을 키우고 이전 시대와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점을 외면하고, 관리의 무능이 농민군의 폭력과 약탈을 초래했다는 단선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셋째, 정제되지 않은 이야기가 많아 다른 자료와의 대조를 통해 사실 여부를 판단해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책의 간행

황현은 자결에 앞서 이 책을 외부인에게 절대 보이지 말라고 부탁했다. 후손들은 유언에 따라 책의 존재를 극비에 부치다가 부본(副本)을 몇 부를 만들고 비밀리에 중국 상하이에 망명해 있는 김택영에게 보내 교정을 부탁했다.

이 책의 존재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김택영이 지은 『한사경』(1914)의 참고문헌 목록에 『매천야록』이 포함된 이후였다. 그러나 책 제목만 알려졌을 뿐 원본은 줄곧 베일에 싸여 있었다. 1939년 신석호가 자료수집 차 장남 황암현을 만나 원본 열람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다가 해방 후인 1954년 신석호가 차남 황위현을 찾아가 비로소 원본과 김택영 교정본을 확인했고, 이후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료총서 제1집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참고문헌

임형택 외역, 『역주 매천야록』 상·하, 문학과지성사, 2005

박걸순, 「매천 황현의 당대사 인식을 둘러싼 논의」, 『한국근현대사연구』 55, 2010

신석호, 「매천야록 해설」, 『매천야록』, 국사편찬위원회, 1955

윤병석, 「매천야록」, 『한국근대사요론』, 일조각, 1979

한철호, 「매천야록에 나타난 황현의 역사인식」, 『한국근현대사연구』 55, 2010

홍영기, 「황현」, 『한국사시민강좌』 41, 일조각, 2007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