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책 이야기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중국 경극에 등장한

다섯 개의 비도를 두른

푸른 얼굴의 장수

당 태종 이세민을 도망치게 하고

중국인을 공포에 떨게 한 용맹한 장수

고구려의 연개소문

연개소문에 대한 엇갈린 평가

그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

"흉악하고 잔인하였으며

도리를 지키지 않았다."

그러나

신채호의 그에 대한 평가

"그는 구제도를 타파하고

당태종을 격파하였을 뿐 아니라

당에 진격하여 중국을 놀라게 하였으니

혁명가의 기백을 가졌다."

『조선상고사』

김부식 vs 신채호

기존 고대사 인식이었던

김부식의 삼국사기 관점을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고대사를 서술한 책

조선상고사

일제의 강제 병합과 식민지배

땅에 떨어진 민족의 자존감

신채호는 민족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우리 민족의 유구하나 역사를 강조하기 위해

1920년대 초반(1923~4년 전후)에

〈조선사(朝鮮史)〉 집필에 착수

1928년 대만에서 체포, 뤼순 감옥에 투옥되면서 집필 중단

〈조선사〉는

1931년 6월 10일~10월 14일에 걸쳐

〈조선일보〉에 총 103회 연재

그러나 고대사만 연재되고 중단

1948년 종로서원에서

〈조선상고사〉로 출간

신채호의 역사 인식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 상태의 기록"

〈조선상고사〉 총론

기존의 고대사 인식 vs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

단군조선 부정 vs 단국조선을 대단군조선으로 확대 인식

한사군은 한반도내에 위치 vs 한사군은 랴오둥(요동)지역에 위치

통일신라 중심의 고대사 인식 vs 부여-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인식

〈조선상고사〉의 고대사 서술

대단군왕검의 나라 수두

신한·말한·불한의 삼경을 둠

이후, 삼조선으로 분립

삼조선의 분립

신조선

해모수가 다스리는 나라

불조선

기자가 다스리는 나라

말조선

한(韓)씨가 다스리는 나라

삼조선의 발전

부여 → 신조선 유민 → 진한

위만조선 → 기자조선 유민 → 변한

한 → 위만조선 한나라에 의해 멸망 → 한사군

한사군 → 낙랑국 유민 → 마한

고구려

백제

신라

부여의 맥을 이은 고구려

〈조선상고사〉

총 11편 서술중 5편을

고구려 중심으로 서술

민족 고유의 신앙으로

수두와 낭가 사상을 강조하고,

고구려 강성의 이유로

인재를 양성하는 선배제도를 언급

동아시아에 우뚝 선 강한 나라 고구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통하여

신라 중심에서 고구려 중심으로,

한반도에서 만주로 역사 무대를 확대,

고대사의 인식 전환을 시도하였다.

이를 통해

찬란했던 고대사 복원하고

민족의 자존감 고취,

민족 문화의 고유성을 강조하였다.

민족정신을 담아야

역사가 새로워진다고 주장하고

민족의 희망과 미래를

역사에서 찾은 단재(丹齋) 신채호

주체적 시각에서 서술한 새로운 역사서

조선상고사

1. 신채호의 생애

신채호(1880~1936)는 충남 대덕군 산내에서 신광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898년(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1905년(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1905년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에 논설기자가 되었다. 1906년에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국민을 계몽하는 글을 쓰면서 언론운동을 펼쳤다. 1907년에는 안창호·양기탁 등과 함께 신민회를 만들었으며 신문의 논설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10년 4월에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1911년에 블라디보스톡에서 광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상해와 북경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힘썼다. 1911년에는 대종교에 입교했으며 1914년에는 윤세복의 초청으로 중국 봉천성(奉天省) 회인현(懷仁縣)의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이때 광개토왕릉비를 비롯한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였고, 『조선사』(5권) 집필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워지자 임시 의정원의원으로 뽑혔으나 이승만의 외교노선에 반대하여 물러났다. 이후 그는 무정부주의자로 전향하였으며 1928년 폭탄제조소 설치 자금을 마련하다가 타이완에서 체포되었다. 1935년 5월 대련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36년 여순감옥에서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2. 신채호의 고대사 연구

신채호는 애국계몽운동에서 무장독립투쟁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한국 근대사 속에서 언론인·역사가·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한국사회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내적으로 봉건사회를 타파하면서 새로운 근대사회를 건설해야 하고 외적으로 서구 자본주의 열강을 비롯한 중국·일본 등의 외세로부터 국가를 지켜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역사학에서도 근대적인 연구방법론을 수용하여 한국사를 새롭게 서술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채호는 박은식을 계승하면서도 그의 중세적 역사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근대 역사학의 이론체계를 성립시킨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채호의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일부 논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주로 『독사신론』·『대동역사(고대사)』·『조선사연구초』·『조선상고문화사』·『조선상고사』 등 그의 저작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들 저작의 대부분이 고대사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의 역사인식은 주로 고대사 인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3. 신채호의 저작과 특징

신채호의 저작은 실제 집필 시기와 연재·출판 시기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독사신론』은 1908년에 『대한매일신보』(1908.8.27.~12.13)에 연재되었기 때문에 초창기 그의 역사인식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조선사연구초』는 『동아일보』(1925.1.3.~10.26)에 연재되었고 1929년에 『조선사연구초』(조선도서)로 출판되었다.

이후 1928년 그가 대만에서 체포되자 홍명희·안재홍 등이 그의 원고를 『조선일보』 학예란에 『조선사[조선상고사]』(1931.6.10.~1931.10.14. : 103회)와 『조선상고문화사』(1931.10.15.~12.3./1932.5.27.~5.31)로 각각 연재하였다. 『조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는 1923~24년 전후에 각각 집필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당시 민세 안재홍이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조선사』는 해방 이후 1948년에 『조선상고사』(종로서원)로 출판되었는데 이 책의 서문을 안재홍이 썼다.

『조선사』는 연재 당시 '조선사(朝鮮史)'로 되어 있었다. 신채호는 처음에 『조선사』를 통사로 기획하였으나 실제로는 상고사 부분의 집필에 그치고 말았다. 그래서 1948년 출판 당시에 본문에는 '조선사'로, 표제에는 '조선상고사'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신채호가 『대동역사』를 통사체제로 염두해 두고 집필하였지만 실제는 고대사 부분에만 그친 것과 비슷하다.

이윤재(李允宰)의 회고에 따르면, 1920년대 전반 신채호가 『조선사』(5권)(<조선통사론>·<문화편>·<사상변천편>·<강역고>·<인물고>)를 집필했다고 하지만 실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독사신론』(1908) 이후 신채호의 역사인식의 변화과정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일정한 한계가 있다.

그런데 최근 『독사신론』(1908) 이후 신채호가 1908~11년 사이에 집필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소장 『무애산고(無涯散稿)』 「대동제국사서언(大東帝國史叙言)」이 알려지게 되었다. 비록 서언 부분만 남아 있지만 『독사신론』 이후 신채호의 역사인식 체계를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2013년에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국학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던 신채호의 『대동역사(고대사)』가 발견되었다. 이 책의 총론에 해당하는 부분이 『무애산고』 「대동제국사서언」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대동역사』가 『대동제국사』와 같은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대동제국사서언」(=『대동역사』 총론)은 『조선상고사』의 총론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신채호의 역사인식 방법론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많이 된다.

한편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1907년 무렵에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과 지나식(支那式)의 연의(演義)를 본받은 비(非)역사 비(非)소설인 『대동사천년사』를 썼으나 중단되었다고 회고하였는데, 그 책이 바로 『대동역사』(=『대동제국사』)이다. 그리고 신규식(申圭植 : 1880~1921)이 『한국혼(韓國魂)』(1914)에서 언급한 '금협산인(錦頰山人)'의 『대동사』도 동일한 책이다.

또한 2004년에는 신채호가 북경에서 발간한 『천고(天鼓)』 1·2호의 내용이 국내에 알려지고 2012년에는 『천고』 3호의 내용 전체가 소개되었다. 그리고 근래에 북한에서 소장하고 있는 신채호의 유고 목록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자료가 공개된다면 앞으로 신채호의 역사인식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4. 『조선상고사』에 나타난 신채호의 역사인식

『조선상고사』는 모두 11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편은 총론이고 제2편부터 마지막 제11편까지는 수두시대, 삼조선분립시대를 거쳐 삼국시대까지를 다룬 조선상고사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가 신채호의 역사 인식 및 연구 방법론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그러한 방법론에 입각하여 그가 구체적으로 서술한 역사, 즉 한국 고대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상고사』의 이해는 총론으로서 역사 인식과 각론으로서 역사 서술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총론은 '사(史)의 정의와 조선 역사의 범위', '사(史)의 삼대원소와 조선 구사(舊史)의 결점', '구사의 종류와 그 득실의 약평(略評)', '사료의 수집과 선택에 대한 상권(商權)', '사(史)의 개조(改造)에 대한 우견(愚見)' 등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 역사의 정의, 역사 집필의 3요소, 전근대 역사 서술의 비판, 왜곡된 사료의 비판과 새로운 사료의 선별, 새로운 역사 서술 방법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아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신채호의 이러한 연구 방법론은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 「서론」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채호는 「서론」에서 역사의 정의, 집필 방법 등에 대한 시론적 접근을 하였다. 이후 1914년에 집필된 『대동역사(고대사)』 총론에서 '국사는 국민의 필수품', '구사가(舊史家)의 유견(謬見)', '금일 저사(著史)의 곤란', '본(本) 사기(史記) 수채(搜采)의 재료', '국명(國名)', '기원(紀元)', '시대구분' 등의 항목을 설정하였다. 이것은 『독사신론』보다 좀더 진전된 역사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이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의 역사인식'으로 발전된다고 할 수 있다.

1) 역사의 정의

신채호의 역사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역사에 대한 정의이다. 『조선상고사』는 아래의 글부터 시작된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心的)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인류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민족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신채호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으로 보았다. 당연히 조선사에서 아는 조선민족이고, 비아는 주변 이민족이 되기 마련이다. 이에 따라 조선사 서술의 입장도 달라지게 된다.

"조선사를 서술하려 함에 조선민족을 아의 단위로 잡고, (가) 아의 생장발달의 상태를 서술의 제일 요건으로 하고…(나) 아와 상대자인 사린각족(四隣各族)의 관계를 서술의 제이 요건으로 하고 … (다) 언어·문자 등 아의 사상을 표시하는 연자의 그 이둔(利鈍)은 어떠하며, 그 변화는 어떻게 되었으며, (라) 종교가 오늘 이후에는 거의 가치 없는 폐물이 되었지만, 고대에는 확실히 일(一)민족의 존망성쇠의 관건이었으나, 아의 신앙에 관한 추세가 어떠하였으며…"

신채호는 조선사 서술에서 조선민족을 아의 단위로 삼고 비아를 고대 조선의 역사무대의 주변 이민족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아인 조선민족의 언어·문자를 비롯하여 종교를 포함한 신앙에 중점으로 두었으며 이어서 학술·기예·의식주 등의 문제로 서술의 범위를 확장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이러한 역사 인식을 갖기에는 당시 한국사회가 직면한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깊다. 한말 이래 일본, 중국 등 주변 국가의 팽창과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밀려오는 상황에서 스스로 근대화하기 위해서 힘을 길러야 한다는 자강주의(自强主義)가 유행하였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자주독립을 위해 아를 구속하는 비아적 요소인 외세의 정치·군사적 측면과 문화사상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런 점에서 역사학자 이만열은 신채호의 역사학을 '자강독립사학'으로 규정하였다.

이런 역사인식은 아의 역사에서 대외투쟁적 성격을 강조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문화의 고유성을 확대·강조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게 된다. 『조선상고사』에서 대외투쟁을 강하게 하면서 민족 고유의 역사무대를 지키려 했던 고구려가 삼국사 서술의 중심이 되고, 민족 고유의 신앙으로 수두와 낭가사상을 강조한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 구사의 비판

이러한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조선사를 저술할 때 신채호의 가장 큰 비판의 대상은 구사(舊史)와 구사가(舊史家)였다. 구사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전통적인 한국 사서와 『위략』 등 중국측 사서가 포함되었다. 한국 고대사의 실상이 독립자존의 웅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자주적·소아적 모습으로 그린 구사가에 의한 구사 때문이라고 보았다. 『조선상고사』 총론의 '사(史)의 삼대원소와 조선 구사(舊史)의 결점', '구사의 종류와 그 득실의 약평(略評)'은 바로 이러한 점을 비판한 것이다. 신채호는 단군시대의 신지(神誌) 이래의 정통적·독립주의적 역사가 조의(皁衣)·낭가(朗家) 계통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고려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사상이 사대사상으로 변질되었다고 보았다. 한국사는 내란과 외침으로 인하여 탕잔(蕩殘)된 것이 아니라, 역사를 서술한 사가(史家)들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보았다. 즉, 사대사상에 물든 역사가 중국측에서 의도적으로 왜곡한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역사가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의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에서 김부식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신채호는 전통적인 구사(舊史)에 대한 냉엄한 비판과 함께 비유가적인 사료를 재평가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와 같은 한국측 사서와 『위략』과 같이 왜곡된 중국측 사료 대신에 『해동고기(海東古記)』·『삼한고기』 등의 고기류(古記類), 『서곽잡록(西郭雜錄)』·『해상잡록(海上雜錄』 등 야사류, 『신지비사(神誌秘史)』 등의 선가류(仙家類)의 자료에 주목하게 된다. 「갓쉰동전」에 나오는 갓쉰동을 연개소문이라고 보게 된 것도 왜곡된(?) 정사(正史)에 집착하지 않고 자료를 폭넓게 활용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존의 한국고대사 인식과 전혀 다른 단재만의 역사인식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3) 연구방법론

단재는 새롭게 섭렵한 사료를 바탕으로 언어학적 방법론을 적용하여 해석하였다. 단재는 고대사회에서 인명·지명·관명(官名) 등은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할 때 한자의 음을 취해서 표기한 것도 있고, 뜻을 취해서 표기한 경우도 있는데 이를 모두 이두문(吏讀文)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에 보인 바 인명으로 보면 '소지(炤智) 일명 비처(毗處)'라 함은 '빛'의 의(義)가 소지가 됨이며 음이 비처됨이요, '소나(素那) 일명 금천(金川)'이라 함은 '시내'의 의가 금천이 됨이며 음이 소나가 됨이요…"

라고 하여 인명을 이두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물론 이두의 해석은 자의적인 측면이 많다. 이런 점에서 단재는 (1) 본문(本文)의 자증(自證), (2) 동류(同類)의 방증, (3) 전명(前名)의 소증(溯證), (4) 후명(後名)의 연증(沿證), (5) 동명이자(同名異字)의 호증(互證), (6) 이신동명(異身同名)의 분증(分證)의 방법을 제시하였다(『조선사연구초』 「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古史上 吏讀文 名詞 解釋法)」).

단재가 활용한 또 하나의 방법은 지명이동설이다. 이것은 한민족의 역사무대가 변천됨에 따라 지명의 변화도 수반했다는 것으로 한국고대사의 지명고증에 사용된 새로운 방법이었다. 이 방법에 대해 단재는

"일찍 역대의 사책(史冊)을 가지고 상고하건대 조선 북부의 지명이 남부로 옮겨 오고 그 지명의 옮겨옴을 따라 그 고적(古蹟)까지 옮아온 일이 많다."

고 하였다. 부족 등의 이동에 따라 그들이 갖고 있던 지명·강명·산명 등을 옮겨 갔다고 본 것이다. 예를 들어 패수(浿水)라는 강명은 그 강명을 사용한 민족의 이동에 따라 대릉하·요하·압록강·청천강·대동강으로 움직였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확대되어 만주에 있던 전조선[전삼한]이 한반도로 이동하여 후삼한이 되었다고 하는 전후삼한설(前後三韓說)이 나오게 된다. 현재 고대사학계에서 단재의 전후삼한설에 대한 비판이 있지만 지명이동설 자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5. 『조선상고사』의 한국 고대사 체계

『조선상고사』에 나타난 한국고대사 인식의 특징은 크게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삼국 이전의 한국고대사 인식 체계를 새롭게 정립한 것이다. 둘째는 기존 신라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부여·고구려 중심으로 한국고대사를 이해한 것이다. 셋째는 한국고대사의 영역을 한반도·만주를 포함하여 산동지역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단재 이전의 한국고대사 인식체계는 대체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삼조선 체계가 주를 이루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준왕의 남천(南遷)에 따른 삼한정통론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삼한의 정통을 계승한 신라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제국도 조선 후기 이래 역사인식의 주된 흐름에 따라 기자·삼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측면에서 국호를 '한(韓)'으로 정했던 것이다.

이와 달리 단재는 삼국시대 이전의 한국고대사의 체계를 신수두시대, 삼조선분립시대, 열국쟁웅시대, 고구려전성시대로 구분하여 『조선상고사』의 목차를 만들었다. 이것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왕조중심의 체계가 아니라 역사발전단계론에 입각하여 설정한 시대구분론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신수두시대에 대해 살펴보자. 단재는 수두에 대해

"조선족은 우주의 광명이 그 숭배의 대상이 되어 태백산의 수림을 광명신(光明神)의 서숙소(棲宿所)로 믿어 그 뒤에 인구가 번식하여 각지에 분포하매 각기 거주지 부근에 수림을 길러 태백산의 것을 모상(模像)하고 그 수림을 이름하여 '수두'라 하니 '수두'는 신단(神壇)이란 뜻이니…"

"강적이 침입하면 각 수두 소속의 부락들이 연합하여 이를 방어하고 가장 공이 많은 부락의 수두를 제1위로 존숭하여 '신수두'라 이름하니 '신'은 최고 최상을 의미한 것이며 기타의 각 '수두'는 그 아래 부속하였나니, 삼한사에 보인 '소도'는 '수두'의 음역이며 '신소도(臣蘇塗)'는 '신수두'의 음역이요, '진단구변국도(震壇九變局圖)'에 보인 '진단'의 '진'은 '신'의 음역이며 단은 수두의 의역이요, 단군(壇君)은 곧 '수두하느님'의 의역이니라. 수두는 소단(小壇)이요, 신수두는 대단(大壇)이니 일(一) 수두에 일단군(一壇君)이 있었은즉 수두의 단군은 소단군(小壇君)이요, 신수두의 단군은 대단군(大壇君)이니라."

라고 하여 수두를 광명신을 모시는 신단(神壇)으로 보고, 삼한의 소도를 수두의 음역[이두]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단군을 수두하느님의 의역으로 보고 신수두의 단군을 대단군으로 보았다. 따라서 수두시대는 신수두의 단군이 여러 수두의 소단군을 거느리는 대단군왕검의 시대로 본 것이다. 그리고 이 수두의 발원지를 송화강 근처의 하얼빈 부근, 즉 부여의 발상지로 이해하였다.

신수두시대에는 대단군이 신한이 되고 신한이 곧 대왕이고, 불한과 말한이 좌우의 두 부왕(副王)으로서 신한을 돕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신한의 왕이 상경(上京 : 스라, 하얼빈)을 불한이 중경(中京 : 아리티, 요동반도 개평)을, 말한이 남경(南京 : 펴라, 평양)을 다스린다고 하였다. 삼한의 밑에 돗가, 개가, 소가, 말가, 신가의 오가(五加)를 두고, 전국을 동남서북중 오부(五部)에 나누어 오가가 중앙의 5개 국무대신이 되는 동시에 오부를 분치하는 5개의 지방장관이 되고, 신가는 오가의 수위(首位)가 된다고 하였다.

신수두시대의 단군은 중국의 수재(水災)를 구제하기 위해 아들 부루(夫婁)를 창해사자(滄海使者)로 삼아 도산(塗山)에 가서 하우(夏禹)를 보고 삼신오제교(三神五帝敎)의 일부분이 되는 오행설을 전하고 치수법을 가르쳤기에 우임금이 부루의 덕을 생각하며 삼신오제의 교의를 믿어 이를 중국에 퍼뜨린 것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정전(井田)과 율도량형(律度量衡)도 중국의 창작이 아니라 조선의 것을 모방한 것으로 보았다. 기자가 은주교체기(殷周交替期)에 조선으로 온 것은 은의 국교인 수두교가 압박을 받으므로 고국을 버리고 수두교의 조국(祖國)으로 돌아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단군이 기자를 정착시켜 준 곳이 요동반도 개평을 중심으로 한 불한[불조선] 지역으로 보았다.

그 뒤 대단군 중심의 신수두시대는 기원전 4세기대에 삼조선으로 분립하게 된다. 신조선[신한]은 대단군왕검의 자손 해씨에 의해 흑룡강성·길림성 지역을 중심으로 계승·발전되었으며, 후에 북부여와 동부여로 분기된다고 보았다. 이 부여에서 출발한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때문에 단재는 고조선의 정통이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진다고 이해했던 것이다. 단재의 부여·고구려 중심의 한국고대사 인식체계는 바로 삼조선 인식체계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불조선[불한]은 기자의 후손 기씨에 의해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발전되었다고 보았다. 기원전 4세기말 불한의 조선후(朝鮮侯) 기씨(箕氏)가 신한 조선왕(朝鮮王) 해씨(解氏)를 반하여 스스로 신한이라 칭하면서 삼조선, 즉 3개의 신한[조선왕]으로 분열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삼조선 분립을 주동한 자를 『위략』에 보이는 기원전 4세기말 대부(大夫) 예(禮)로 보았다. 기원전 2세기 초 위만이 찬탈한 왕권은 고조선 전체가 아니라 불조선에 한정되는 것으로, 한무제가 설치한 한군현도 이 지역에 한정된다고 할 수 있다.

말조선[말한]은 한씨(韓氏)에 의해 압록강 이남의 평양을 중심으로 이어진다. 이후 국호를 마한[말한]으로 고치고 남쪽의 월지국(月支國)으로 천도하였으나 기준(箕準)에 의해 멸망하였다고 보았다. 단재는 말조선이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기』 이외의 사서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삼조선은 대한족격전시대(對漢族激戰時代)에 해당하는 열국쟁웅시대에 이르러 자체 변화뿐만 아니라 삼한을 성립시키게 된다. 신조선이 북부여와 동부여로 분열되자 신조선의 일부 유민이 낙동강 연안의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진한(辰韓)을 성립시키고, 불조선의 기씨는 위만에게 쫓겨 마한을 탈취하고, 그 유민의 일부는 낙동강 연안의 왼쪽에서 변한을 결성하며, 한씨의 말조선은 기씨의 불조선보다 먼저 남쪽 월지국[목지국]으로 천도하여 마한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이른바 단재의 전후삼한설이다. 전조선인 삼조선이 삼한의 성립과 연결된다고 본 것이다. 단재는 부족 및 지명의 이동설을 통해서 전후삼한설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전후삼한설은 흑룡강성·길림성 지역의 북부여·동부여와 한반도 중남부 이남의 삼한을 하나의 계통, 대단군왕검의 후예로 설명할 수 있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리를 이해하기 쉽게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前朝鮮(前三韓)
國名 신[辰=眞]조선 불[弁=番]조선 말[馬=莫]조선
王號 신한[대王]=大壇君=신수두=司祭長 불한[副王]=小壇君=소수두 말한[副王]=小壇君=소수두
三神 우주 유일신의 대표 : 太一 [최고신=신수두] 地神의 대표 : 地一 [天使] 天神의 대표 : 天一 [上帝]
三京 스라[上京, 하얼빈] 아리티[中京, 蓋平] 펴라[南京, 평양]
강역 길림․흑룡강성, 연해주 남단 요동반도 압록강 이남
解氏 : 북부여 해모수 箕氏 : 기자의 자손 韓氏
분열 불한 朝鮮侯 箕氏가 신한 朝鮮王 解氏를 叛하여 스스로 신한이라 칭함. → 三朝鮮, 즉 3개의 신한[朝鮮王]으로 분열. cf. 燕의 稱王(B.C. 323경). 大夫禮가 삼조선 분립을 주동함.
후예 부여(북부여, 동부여) 위만조선 한군현(요동반도 : 圖上계획) 崔氏 樂浪25國
南三韓(後三韓)
南三韓 마한이 낙동강 우편에 신조선유민을 안착. 辰韓部. 마한이 낙동강 우편에 불조선유민을 안착. 卞韓部. 변한에 신조선 유민도 잡거→ 卞辰韓이라고도 함. 마한으로 改號. 目支國으로 천도=辰王. 불조선왕 箕準에게 망함. 箕準이 韓姓을 칭함. 삼한의 주도권 행사.

단재의 대단군왕검을 중심으로 한 한국고대사 인식체계는 기본적으로 부여·고구려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상고사』에서 제2~4편이 삼국 이전의 고조선사에 해당되는 부분이고 제5~11편이 고조선을 계승하여 비아(非我)인 한족(漢族)과 격렬하게 투쟁하였던 고구려의 역사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던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한국고대사를 부여·고구려를 중심으로 이해했던 역사 인식은 비단 단재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에 활동하였던 백암 박은식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단재는 백암보다 좀더 치밀하게 인식체계를 구성했으며 이러한 인식은 1930년대 조선학 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정인보, 안재홍 등 민족주의사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단재의 한국고대사 인식체계에서 조선민족의 역사무대는 삼조선이 있었던 요동, 길림성, 흑룡강성, 한반도뿐만 아니라 요서와 산동지역까지 확대된다. 그는 기원전 6~5세기경에 불리지(弗離支)란 자가 조선의 군대를 이끌고 하북·산서·산동 등을 정복하고 하북성 대현(代縣) 부근에 불리지국(弗離之國)을 세웠으며 그가 산동을 정복한 뒤에 조선과 발해를 중심으로 교역을 했다고 보았다. 단재는 회(淮)·강(江) 유역에 있었던 서언왕(徐偃王)을 비롯한 동이족을 부여족으로 보았으며 이들의 활동을 식민활동으로 이해하였다. 이처럼 단재가 구상했던 한국고대사의 무대는 중국 동북지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산서·하북·산동·강소성 등 환발해(環渤海)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나아가 백제가 요서지역으로 진출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위만조선이 망하고 한무제가 세웠다는 한의 군현[낙랑·진번·임둔·현도군]은 한반도에 있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위만조선은 기자의 후예인 불조선[불한]의 준왕을 몰아내고 세운 왕조였다. 불조선이 요동반도 개평현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한군현의 위치도 요동반도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만 단재는 한무제의 군현 설치가 실제로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도상(圖上) 계획에 그치고 말았다고 보았다. 이러한 한군현에 대한 이해 방식은 당시 통설적인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진다고 보는 평양 중심의 3조선설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6. 『조선상고사』의 역사적 의의

신채호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을 연재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고대사 연구에 뛰어들었다. 이후 그의 연구는 『대동역사』,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문화사』를 거치면서 한국고대사 인식체계가 좀더 확대·발전되었으며 『조선상고사』를 통해서 완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전까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신수두시대에서 삼조선시대로, 전삼한이 후삼한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구조적 인식체계를 구축하였다. 이에 걸맞게 조선민족의 역사무대도 한반도에 국한하지 않고 만주를 비롯하여 산서·하북·산동·강소성까지 넓혔다.

또한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보면서 조선사를 연구한 방법론은 이전과 다른 근대적 학문방법을 적용한 것이었다. 특히 그의 언어학적 방법론은 역사인식과 더불어 민족주의사학계열의 정인보·안재홍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민족주의역사학이 근대 학문으로서 자리매김하는 데 단재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단재의 조선사 서술은 통사적인 체제를 목표로 했던 제목과 달리 고대사 부분의 서술에 그치고 말았다. 그가 고려·조선시대를 어떻게 이해하였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