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문화·예술 이야기
도성과 왕궁

베트남의 하노이 궁전

러시아의 크레믈린 궁전

미국의 백악관  

터키의 앙카라 궁전

대한민국 <청와대>

이는 전 세계의 최고지배자의 집무실이자 거처다.

그리고, 고대엔 최고 지배자의 거주공간이자 정무공간인 왕궁이 있었다.

국가와 왕권의 위엄 / 도성과 왕궁

국가 단계 사회의 최고 지배자의 일상적인 거주 공간이자

정무를 수행하는 궁을 포괄하는 성이었던 궁성!

애석하게도 지금 남아 있는 궁성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만

우리 역사, 그리고 인류 역사에서 도성과 왕궁의 의미는 참으로 큽니다.

인류 역사에서 국가 단계로 성장한 사회엔 성벽을 두른 도시형태의 취락이 등장했다.

국가 사회를 운영하는 최고 지배자와 핵심인원 그리고 시설이 밀집된 도시형태를 도성이라 한다.

도성 안엔 종교시설 및 제의시설이 있고, 수공업 생산시설, 그리고 주민거주 지역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왕궁이 있다.

이는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의 도성의 특징이다.

우리나라 왕궁의 유래는 중국의 궁성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궁성 형태 6가지를 살펴볼까요?

【1유형】
하남성(河南省) 옌스(偃師) 얼리터우(二里頭)
(그림2 참조)
- 궁이 도성 주민의 거주구역 중앙에 위치
- 외곽은 아직 등장하지 않음
-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먼저 국가가 성립된  중국 최초의 도성
- 도성의 가운데에 위치한 궁은 담장을 두른 궁성의 형태
【2유형】
하남성 옌스 상성(商城)
(그림3 참조)
- 도성 중심에 있는 궁성 위치는 같음
- 주민 거주구역에도 사방을 외곽성으로 두름
- 내성외곽형으로서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도성의 형태
【3유형】 - 궁성과 외곽이 분리된 형태
- 춘추전국시대에 처음으로 등장
- 궁성은 전체 도성의 서쪽에 치우쳐 있는 경우가 많음
- 궁성이 일반 주민 거주구역과 분리된 형태
【4유형】 - 전국시대를 마감한 진(秦)의 천하통일 이후에 등장한 도성
- 도성의 외곽이 없어짐
- 도성 내부 곳곳에 궁성이 다수 배치되는 유형
【5유형】
하북성(河北省) 예청(鄴城)
(그림4 참조)
- 궁성과 외곽성이 다시 하나로 합쳐진 형태로 2유형과 유사
- 궁성의 위치가 전체 도성의 북쪽 중앙에 위치
- 후한(後漢) 말 군벌 세력의 하나였던 조조(曹操)의 군사적 거점이었던 하북성(河北省) 예청(鄴城)에서 처음으로 등장
-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 수나라 및 당나라까지 지속됨
- 중국 이외의 한반도 및 일본열도 등에 영향을 미친 고대 동아시아 도성제의 전형
【6유형】
하남성(河南省) 카이펑(開封)에 위치한 송(宋)
동경(東京)
- 5유형 외곽성 밖에 다시 외곽성을 부가
- 이중의 외곽성을 두른 형태
- 궁성을 포함한 도성의 핵심시설이 최외곽성의 중앙에 위치
- 하남성(河南省) 카이펑(開封)에 위치한 송(宋) 동경(東京)에서 비롯된 유형
- 중국 최후의 전근대 도성인 청(淸)의 북경(北京)까지 그 영향을 미침
- 기존의 궁성을 포함한 외곽성 부분이 내성(內城)으로 변모

고대 삼국의 왕궁은 어떤 형태였는지 시대별 궁성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삼국의 왕궁

고구려 전기 도성의 이름은 졸본, 홀본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치된 견해는 없다.

환인현 중심지에서 혼강을 건너 서북 약 3km 지점 강변 충적대지에 위치한 고구려 전기의 대표적인 왕궁인 하고성자성

▣ 하고자성의 형태

- 토축으로 된 성벽은 1920년대 대홍수로 동벽이 유실

- 북·서·남벽만이 남아 있고, 서벽은 지상의 흔적이 미미

- 서성벽 170m, 북성벽 240m, 남성벽 205m, 추정 동성벽 200m 전후이며, 서성벽 외부에는 폭 약 10m 전후의 해자 존재

* 垓字 : 성벽 바깥에 인공으로 만든 도랑 모양의 방어시설

- 성벽은 항토(夯土), 서로 다른 성질의 흙을 시루떡처럼 다져 쌓았음.

- 유실된 부분을 감안, 당초 성의 규모는 37,000㎡ 정도 되는 장방형

▣ 하고자성의 특징

- 평지에 축조한 평상시의 성과 적이 침공해 올 때 도피할 수 있는 산성으로 구성

- 하고성자는 도피용의 산성인 오녀산성(五女山城)에 대응되는 평상시 도성

- 왕궁 및 관부 등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큼

고구려 중기 대표적인 성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 위치한 집안현성

▣ 집안현성의 형태

- 최초 토축성벽으로 되었으나 2차례 석축 성벽으로 개축

- 토축성벽은 항토로 축조 한 후, 석축 성벽으로 고쳐 쌓았음.

▣ 집안현성의 특징

- 석축 성벽 가운데 최후의 것은 중화민국 시기에 보수함

- 최초의 토축 성벽은 고구려 주민들이 쌓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구체적으로 계루부(桂婁部)와 관련시키기도 함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집安縣) 통구성(通溝城) 위치한 국내성

▣ 국내성의 형태

- 중앙에 왕궁이 위치

- 주위에 귀족 및 도성 주민들의 거주구역이 배치

- 한국 고대 도성 중, 내성외곽형을 채택한 최초의 예

▣ 국내성의 특징

- 국내성 중앙에서 격이 높은 건축물의 존재를 시사하는 유물이 다수 출토

- 국내성은 4세기 1/4분기 무렵에도 이미 평지에 위치한 도성으로 기능 했을 것으로 추정

고구려 후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427년(장수왕 15)에 평양으로 천도,그 후 552년(양원왕 8) 장안성(長安城)을 축조하고 586년(평원왕 28)에 장안성으로 다시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 후기도성에는 처음의 도성인 ‘평양성’과 다시 천도한 ‘장안성’ 이라는 2개의 평지 도성이 존재한다.

북한의 행정구역상 평양특별시 대성구역 청암리에 위치한 평양성(청암리토성)

▣ 평양성의 형태

- 청암리토성 출토 와당은 평양지역의 도피산성인 대성산성(大成山城) 출토예와 매우 유사

- 총연장은 3450m로, 문지는 서·북·동문 등 3개소가 있음

▣ 평양성의 특징 (427~586년)

- 일찍부터 청암리토성(淸岩里土城)으로 지목

- 1970년대 북한 학계가 안학궁(安鶴宮)지를 평양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

- 일부 국내 연구자도 그에 동조

- 안학궁을 방어하는 군사적 목적의 성이라는 것으로 추정

- 1938년도 발굴조사에서 불교사원이 확인

- 1990년대 발굴조사에서 기와, 벽화편 등이 발굴되면서 단순한 군사적 목적의 성으로 보기 어려움

평양시 시가지 위치에 위치한 장안성은 552년에 축조가 시작되어 586년에 천도한 것으로 기록됐다.

▣ 장안성의 형태 (586~668년)

- 북으로부터 북성, 내성, 중성, 외성 등 모두 4개의 구역으로 구성

- 왕궁이 위치한 곳은 내성구역

- 북쪽 산상에는 방어력이 높은 북성이 위치

- 남쪽에 관부 및 일반인의 거주구역이 배치된 외성 존재

- 내성 130만㎡ ,외성 1030만㎡(중성 300만㎡ 포함)

- 북성 25만㎡ 성문은 암문(暗門) 1개소 포함하여 모두 17개소

▣ 장안성의 특징

- 등급별 도로에 의해 격자형의 공간 구획

- 한백겸(韓百謙)의 『구암유고(久庵遺稿)』에 기록

- 장안성 북쪽 중앙에 위치한 왕궁과 남쪽을 격자형 민리(民里 : 도성 주민 거주구역)로 구획한 5 유형 도성

- 장안성은 5 유형 도성이 한반도 고대 도성에채택된 사례로 매우 중요

평양시 대성산(大城山) 위치한 안학궁

▣ 안학궁의 형태

- 한 변 622m의 정사각형(면적은 38만 ㎡) 평면에 성벽을 두름

- 동, 서 두 성벽 바깥에는 해자(垓字)를 배치

- 궁장은 아랫부분에는 석축하고 그 윗부분은 흙으로 다져 쌓았음

- 성문은 남벽에 3개소 그 밖의 성벽에는 각 1개씩 모두 6개

▣ 안학궁의 특징

- 안학궁 출토 와당은 최근 발굴조사가 진행된 개성의 고려 왕궁인 만월대에서 출토된 것과 매우 흡사

- 안학궁의 연대는 『고려사』에 1081년(문종 35)에 조영하였다는 서경(西京)의 좌궁(左宮)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가장 유력

『삼국사기』 백제본기 및 지리지 등 문헌사료에 의하면, 백제의 도성은 위례성(慰禮城) →한성(漢城)→웅진(熊津)→사비(泗沘) 순으로 변천됩니다.

백제

백제는 250~300년 무렵에 성벽을 구비한 도성이 등장한다.

한성기 도성인 풍납토성, 몽촌토성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한성시기에 ‘북성(北城 : 大城)’과 ‘남성(南城 : 王城)’ 이란 내용이 있는데

이 성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333년(비류왕 9) 왕궁에 불이나 주변의 민가에 옮겨 붙은 사실이 기록

- 삼국사기 백제본기 -

이 기록으로 풍납토성안엔 왕궁을 비롯한 도성의 핵심시설과 더불어 주민의 거주구역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일반적인 백제 주거지는 지하로 땅을 파서 만든 수혈주거지 형식이나 이 건물은 지상식으로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고, 건물의 사방에 도랑을 파고 그 바닥에 돌을 깔아 놓은 점 등이 예사롭지 않다.

웅진기 왕궁

웅진기 왕궁과 관련된 문헌사료는 많지 않다.

그저 몇 가지 사실만 전해질 뿐이다.

- 486년(동성왕 8)조에 궁실을 고친 기록

- 궁의 남쪽에서 열병(閱兵)한 기록

- 489년(동성왕 11)에 남당(南堂)에서 여러 신하들과 연회를 한 기록

- 500년(동성왕 22)에 궁의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우고 연못을 파고 희귀한 새를 기른 사실 및 연회를 한 기록

사비기

사비기 도성 (사비도성)

이전의 백제 도성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도성 전체를 외곽성(外郭城)으로 방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도성의 북쪽에 군사적 성격이 강한 방어용 산성을 두고 그 남쪽 기슭에 왕궁을 배치함과 더불어 가로망에 의해 구획된 격자형 주민 거주구역을 설치한 점 역시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격자형 거주구역은 사비도성이 한반도 고대 도성 중 최초의 사례이다.

‘여우 무리가 궁중에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 백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上佐平) 책상에 올라앉았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659년(의자왕 19)년 -

이 기록으로 당시 왕궁의 위치가 여우 무리가 출몰할 수 있는 정도로 주변 원림(園林)과 연결되어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또한, 왕궁 권역, 즉 궁성 내에는 상좌평의 집무실도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익산왕궁

백제 왕궁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익산왕궁은 동서 약 240m, 남북 약 490m의 장방형 평면으로, 폭 3m의 궁장(宮墻)으로 둘러싸여 있다.

익산 왕궁 유적의 궁장은 지금까지 일본의 고유한 전통이라 여겼던 축지병의 기원이 백제의 왕궁 담장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익산 왕궁의 궁장에는 남쪽에 4개의 문지, 동·서· 북쪽에 각각 1개의 문지가 존재한다.

신라

신라 도성의 공간 구획은 3단계로 나뉜다.

① 황룡사 창건 시점을 전후한 6세기 중·후엽, 도성 내부 공간에 최초의 정연한 구획의 시도

② 삼국을 통일한 직후 안압지 조성 등의 일련의 도성 공간 재정비가 이루어진 7세기 후 반경

③ 도성 공간이 현재의 경주시내 일원에 남아 있는 공간 구획 흔적과 거의 같아지는 단계로써 대략 8세기 이후에 해당

신라의 도성은 고구려 백제 등 여타 삼국과 달리 그 위치 변동 없이 장구한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금성’은 삼국사기에 27건, 삼국유사에 4건의 기사가 확인된다.

482년(炤知王 4) 이후 ‘금성’은 더 이상 확인되지 않으나, 금성은 신라 도성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월성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만월성’은 ‘신월성(新月城)’ 북에 위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월성 북쪽으로 궁역을 확대한 것을 만월성으로 불렀을 것으로 이해된다.

월성은 신라의 정궁이 소재한 곳으로서 삼국사기에는 ‘재성(在城)’, ‘신월성(新月城)’ 등으로 부르기도 했고, 현재는 ‘반월성’ 으로 불린다.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 국가 성장에 따른 중앙집권력의 증대로 6세기 전반~후반에 걸쳐 구획이 등장했다.

신라 역시 6세기 후반 경에 이르러 격자형 도시 공간 구획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토대로 신라의 왕궁은 대체로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단계는 왕궁이 아직 일반 주민들의 거주 구역과 완전히 독립되지 않은 단계이고, 두 번째 단계는 일반 도성 주민의 거주구역과

분리된 왕궁의 출현

마음을 닫는 벽이 아닌

우리를 지키는 벽이었던 도성과 왕궁

시대별 특징과 구성은 달랐지만

왕권과 국가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했던 그 마음은 같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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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자문 : 박순발

시나리오 구성 : 안현진, 김민상

성우 : 오수경

MC : 주혜빈, 황바울

삽화 : 이광일

자료 협조 :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문화재청, 한성백제박물관, E-뮤지엄

연출 : 김형우, 이혁로, 이연식

기획 제작 : 아리랑TV미디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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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발〉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