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 21년(521) 겨울 11월, 사신을 양(梁)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에게 격파당하여 쇠약해진 지가 여러 해였다. 이때 이르러 표를 올려,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려 비로소 우호를 통하였으며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라고 일컬었다. 12월에 양나라 고조(高祖)가 조서(詔書)를 보내 왕을 책봉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행(行) 도독(都督) 백제제군사(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백제 왕 여융(餘隆)은 해외에서 번병(藩屛)을 지키며 멀리 와서 조공을 바치니 그의 정성이 지극하여 짐은 이를 가상히 여긴다. 마땅히 옛 법에 따라 이 영광스러운 책명을 보내는 바, 사지절(使持節) 도독(都督) 백제제군사(百濟諸軍事)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으로 봉함이 가하다.”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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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聖王) 즉위년(523)] 가을 8월에 고구려 군사가 패수(浿水)에 이르자 왕이 좌장(左將) 지충(志忠)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출전케 하니 그가 이를 물리쳤다.
2년(524)에 양(梁)나라 고조(高祖)가 조서를 보내 왕을 지절(持節) 도독 백제제군사(百濟諸軍事) 수동장군(綏東將軍) 백제 왕으로 책봉하였다.
3년(525) 봄 2월에 신라와 서로 예방하였다.
4년(526) 겨울 10월에 웅진성(熊津城)을 수축하고 사정책(沙井柵)을 세웠다.
7년(529) 겨울 10월에 고구려 왕 흥안(興安)
연모(燕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五谷) 벌판에서 항전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사망자가 2000여 명이었다.
안장왕(安藏王)
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쪽 변경 혈성(穴城)을 함락시켰다. 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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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538) 봄에 도읍을 사비(泗沘)
【소부리(所夫里)라고도 한다】
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18년(540) 가을 9월에 왕이 장군 연회(燕會)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우산성(牛山城)을 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26년(546) 봄 정월에 고구려 왕 평성(平成)
양원왕(陽原王)
이 예(濊)와 공모하여 한수(漢水) 이북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해 왔다.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신라 왕이 장군 주진(朱珍)을 시켜 병사 3000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그곳에서 고구려 군사들과 일전(一戰)을 벌려 크게 이겼다. 28년(548) 봄 정월에 왕이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격케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3월에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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