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金庾信, 595~673)의 아들 [김]원술(元述)은 비장(裨將)이었는데 또한 전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보좌하던 담릉(淡凌)이 그것을 말리며, “대장부가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을 곳을 택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만약 죽더라도 이루는 것이 없으면 살아서 후일에 공을 도모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원술은] “남아(男兒)는 구차하게 살지 않거늘,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내 아버지를 뵙겠는가?”라고 대답하며, 곧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 나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담릉이 고삐를 잡아당기며 놓아 주지 않았고, 끝내 죽지 못하였다. ……(중략)……
대왕이 이를 듣고 유신에게 “군사들의 패배가 이와 같으니 어찌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유신은] “당(唐)나라 사람들의 계략을 헤아릴 수가 없사옵니다. 마땅히 장수와 병졸들로 하여금 각자 요충지를 지키게 하옵소서. 다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다고 생각될 뿐만 아니라 또한 가훈을 저버렸으니 죽여야 하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대왕이 “원술은 비장인데 혼자에게만 무거운 형벌을 내릴 수는 없다.”고 말하며 곧 사면하였다. 원술은 부끄럽고 두려워 감히 아버지를 뵙지 못하고 시골에 은둔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야 어머니를 뵙고자 청하였다. 어머니가 “여인에게는 세 가지 따라야 할 의리가 있는데, 지금 이미 과부가 되었으니 마땅히 아들을 따라야 하겠지만, 원술과 같은 자는 이미 선친에게 아들 노릇을 하지 못했으니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될 수 있으랴?”라고 말하며, 만나 주지 않았다. 원술이 통곡하며 가슴을 치고 펄쩍 뛰면서 떠나지 않았으나 부인은 끝내 만나 주지 않았다. 원술은 탄식하며, “담릉으로 인해 그르친 것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라고 말하였다. 이에 태백산(太伯山)으로 들어갔다.
을해(乙亥)년[문무왕(文武王) 15년(675)]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가 와서 매소천성(買蘇川城)
을 공격하니, 원술이 이를 듣고 죽음으로써 지난 날의 치욕을 씻고자 하였다. 드디어 힘껏 싸워서 공을 세워 상을 받았다. [그렇지만] 부모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을 분하고 한스러워하여 벼슬을 맡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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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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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복(悉伏)이 가잠성(椵岑城) 남쪽 7리에 나와 진을 치고 기다리는 것을 보고는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중략)…… [옛] 말에 ‘막다른 곳에 다다른 도둑을 급박하게 쫓지 마라.’고 하였습니다. 마땅히 조금 물러서서 피로가 극에 달함을 기다려 친다면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장수가 그 말을 그럴 듯하다고 여겨 잠깐 물러났다. 오직 [김]영윤(令胤, ?~684)만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싸우고자 하였다. [그러자] 따르는 자가 고하기를, “지금 여러 장수가 어찌 다 살기를 엿보는 사람으로 죽음을 아끼는 무리이겠습니까? 그러나 [잠시 후퇴하자는] 지난 번의 논의에 찬성한 것은 장차 그 틈을 기다려 편함을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홀로 바로 적진으로 나가겠다고 하니, 그것은 올바르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영윤이 말하기를, “전쟁에 임하여 용기가 없는 것은 『예경(禮經)』에서 경계한 바요, 전진이 있을 뿐 후퇴가 없는 것은 병졸의 떳떳한 분수이다. 장부는 일에 임하여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지, 어찌 반드시 여러 사람의 말을 좇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적진에 나가서 싸우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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