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본기(新羅本紀)」(에 이르기를) “법흥대왕(法興大王) 즉위 14년(527)에 소신(小臣) 이차돈(異次頓)이 불법을 위하여 제 몸을 희생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곧 소량(蕭梁) 보통(普通) 8년 정미(丁未, 527년)로 서축(西竺)
인도를 가리킴
의 달마(達摩)가 금릉(金陵)에 온 해이다. 이 해에 낭지(朗智) 법사가 또한 처음으로 영취산(靈鷲山)에 머물며 불법을 열었으니, 곧 불교(大敎)의 흥하고 쇠하는 것도 반드시 원근(遠近)에서 서로 동시에 감응한다는 것을 이 일로 해서 믿을 수 있다. 원화(元和) 연간(806~820)에 남간사(南澗寺)의 사문(沙門) 일념(一念)이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는데, 이 사실이 매우 자세히 실려 있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옛날 법흥대왕이 임금의 지위에 있으면서 동방[扶桑]의 땅을 굽어 살펴보고 “옛날 한(漢)나라 명(明)
후한(後漢) 2대 황제인 명제(明帝)를 가리킴
이 꿈에 감응을 받아 불법이 동쪽으로 흘러왔다. 과인은 즉위하면서부터 창생(蒼生)을 위하여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만들고자 기원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조정의 신하들
【향전(鄕傳)에 이르기를, “공목(工目), 알공(謁恭) 등”이라고 하였다】
은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大義)만 준수했을 뿐 절을 세우겠다는 신성한 계획은 따르지 않았다. 대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 과인은 덕이 없이 대업(大業)을 이어서 위로는 음양의 조화를 저버렸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즐거움을 없앴으니, 정무의 여가에 마음을 불도[釋風]에 두고자 하지만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때) 내양한 자[內養者]가 있었으니, 성은 박(朴)이고 자는 염촉(厭髑)
【혹은 이차(異次)라고 하고 혹은 이처(伊處)라고도 하였는데, 방언의 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번역하면 염(厭)이 된다. 촉(髑)⋅돈(頓)⋅도(道)⋅도(覩)⋅독(獨) 등은 모두 글 쓰는 사람의 편의에 따른 것으로, 곧 조사(助辭)이다. 이제 윗자만 번역하고 아랫자는 번역하지 않았으므로 염촉(厭髑) 또는 염도(厭覩) 등이라고 한 것이다】
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할아버지는 아진(阿珍) 종(宗)으로, 곧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다
【신라의 관작은 무릇 17등급인데, 그 네 번째 (관작을) 일러 파진찬(波珍喰)이라고 하는데, 또한 아진찬(阿珍喰)이라고도 한다. 종은 그 이름이고, 습보 또한 이름이다. 신라인은 무릇 추봉한 왕을 모두 갈문왕(葛文王)이라고 칭하였는데, 그 내용은 사신(史臣) 또한 자세히 모른다고 하였다. 또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를 살펴보면, 사인(舍人)은 그때 나이가 26세이며, 아버지는 길승(吉升), 할아버지는 공한(功漢), 증조부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고 하였다.】
. 그는 대나무와 소나무가 곧게 뻗은 듯한 자질을 가졌고 맑고 깨끗한 자질을 가지고 뜻을 품었으며, 선을 쌓은 이의 증손으로서 궁궐 내의 인재로 기대를 모았고 성조(聖朝)의 충신으로 태평성대[河淸]의 시종이 되기를 바랐다. 그때 나이 22세로 사인(舎人)
【신라 관작에 대사(大舍)⋅소사(小舍) 등이 있는데, 대개 하사(下士)의 관직이다】
의 직책에 있었다. 용안(龍顔)을 우러러보고 왕의 뜻을 눈치 채고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옛사람은 비천한 사람[蒭蕘]에게도 계책을 물었다고 하니, 죄를 무릅쓰고 대왕의 뜻을 여쭙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네가 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사인이 말하였다. “나라를 위하여 몸을 희생하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이며,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다하는 것은 백성의 곧은 의리입니다. 말을 전달하는 것을 잘못하였다고 해서 신을 벌하여 머리를 벤다면 모든 백성이 모두 굴복하여 감히 (대왕의) 교(敎)를 어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왕이 말하였다. “살을 베어 저울에 달더라도 1마리 새를 살리려고 했고, 피를 뿌리고 목숨을 끊어서라도 7마리의 짐승을 스스로 가엽게 여겼다. 짐의 뜻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데 있는데, 어찌 죄 없는 사람을 죽이겠느냐? 네가 비록 공덕을 쌓는다고 할지라도 죄를 피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사인이 말하였다. “모든 것이 버리기 어렵지만 제 목숨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소신이 저녁에 죽어서 불교[大敎]가 아침에 행해진다면, 불일(佛日)이 다시 성행하고 성주(聖主)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입니다.” 왕이 말하기를, “난새와 봉황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능가할 마음을 가졌고, 기러기와 따오기의 새끼는 나면서부터 물결을 다스릴 기세를 품었다고 하더니 네가 이와 같구나. 가히 대사(大士)의 행동이라고 이를 만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왕은 일부러 위의(威儀)를 갖춰 동서로 풍도(風刀)를, 남북으로 상장(霜仗)을 늘어 놓고1)
여러 신하들을 불러 “경(卿) 등은 내가 정사(精舍)를 짓고자 하는데 고의로 지체시키는가?”
【향전에 이르기를, “염촉이 거짓으로 왕명이라고 하면서 공사를 일으켜 절을 지을 뜻을 전하였더니 여러 신하들이 와서 간하였다. 왕은 이에 염촉을 꾸짖었고, 왕명을 거짓으로 전하였다고 하여 벌하였다”라고 하였다.】
라고 물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전전긍긍하며 황급히 맹서하고 손가락으로 동서를 가리켰다. 왕이 사인을 불러 물으니, 사인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대답할 말이 없었다.
1)
바람 같은 칼, 서리와 같은 곤장으로, 죄인에게 형벌을 내리는 도구이다.
대왕이 분노하여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니 유사(有司)가 그를 포박하여 관아로 끌고 왔다. 사인이 서원(誓願)한 후 옥리(獄吏)가 그의 목을 베니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다
【향전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인이 서원하기를 “대성법왕(大聖法王)께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므로 저는 몸을 돌보지 않고 인연을 모두 버리니 하늘에서는 상서(瑞祥)를 내려 사람들에게 두루 보여주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그의 머리가 날아가서 금강산(金剛山) 꼭대기에 떨어졌다.」】
. 하늘은 사방이 컴컴해지며 볕은 기울어 밝음을 감추고 땅은 진동하고 꽃비가 내렸다.
임금[聖人]은 슬퍼하여 눈물이 임금의 옷을 적셨고, 재상은 근심하여 선면(蟬冕)
관료들이 쓰는 매미 날개 모양 장식을 한 관
에까지 땀이 흘렀다. 샘물이 갑자기 말라서 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어올랐고, 곧은 나무가 먼저 부러지니 원숭이가 떼를 지어 울었다.춘궁(春宮)
태자가 거처하는 전각을 가리킴
에서 말고삐를 나란히 했던 벗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서로 돌아보고, 월정(月庭)에서 소매를 맞잡던 벗들은 창자가 끊어지듯 이별을 애석해하였다. 관을 바라보며 곡소리를 들으면 마치 부모님이 돌아가신 듯하였다. 모두들 이르기를, “개자추(介子推)가 다리 살을 벤 것도 이 굳은 절개에 비할 수 없고, 홍연(弘演)이 배를 가른 일인들 어찌 그의 장렬함에 견주겠는가? 이는 곧 임금[丹墀]의 신력(信力)을 붙들어 아도(阿道)의 본심을 이룬 성자(聖者)로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북산(北山)의 서쪽 고개
【즉 금강산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 장사 지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밝히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에 장사 지냈다. 나인(內人)들은 그를 가엾게 여겨 좋은 곳을 잡아서 난야(蘭若)
절을 가리킴
를 짓고, 이름을 자추사(刺楸寺)라고 하였다.『삼국유사
'삼국유사' 관련자료